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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용 사장은 비록 피터 몰리뉴처럼 하나의 장르를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한국 최초의 3D MMORPG 게임인 뮤를 개발하여 한국 게임의 성과를 드높인 게임 크리에이터이다.
조기용 부사장은 스즈키 유가 개발한 세가의 3D 격투 액션 게임인 버추어 파이터에 감동하여 게임 개발자가 될 것을 꿈꾸게 된다.


혼자서 독학으로 프로그래밍 공부를 하였고 시험 삼아서 만든 프로그램을 하이텔 게임 제작 동호회에 올려서 개발자들 사이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도 3D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하고 있었을 때에 대학교 1학년생이 독학으로 3D 엔진을 개발했다고 하니 사람들이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이런 능력은 많은 게임회사들의 입 소문을 타고 스카우트의 표적이 된다. 조기용 부사장은 한달 동안 만든 이즈미르라는 게임을 미리내에 900만원에 판매하고 미리내소프트에 95년도에 전격적으로 입사한다. 미리내 소프트는 당시만 해도 국내 최고의 게임회사로 게임 사관학교라고 불린 곳이다. 한때 직원이 100명이 넘었던 회사였던 만큼 우리나라의 모든 게임회사의 간부급에는 항상 미리내 출신들이 있을 정도다.
웹젠의 성공에는 미리내 출신이 만들어준 인연이 큰 구심점이 되었다. 같은 시기에 근무한 것은 아니지만 웹젠 신화의 3인방 김남주 사장과 송길섭 CTO가 모두 미리내 출신으로 이들이 쉽게 의기투합하는데 일조했던 것이다. 게다가 뮤가 처음 서비스 될 때에도 미리내 출신들이 많은 입 소문을 내주기도 하였다. 필자 역시 미리내 출신인 회사동료로부터 자신이 아는 최고의 프로그래머가 개발한 3D 온라인 게임이라면서 플레이 할 것을 강권하기도 했다.


미리내 소프트 출신들이 공식 모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같은 회사를 다녔다는 인연으로 서로 암묵적으로 이끌어주는 그 무언가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 미리내 소프트에 입사한 조기용 부사장은 물을 만난 고기처럼 그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고 한다.


사실 조기용 부사장이 처음 하이텔에 3D 게임의 엔진을 처음 올렸을 만해도 의심의 눈초리가 있었다. 외국에서 공개된 유명 소스를 도용해서 마치 자신이 코딩 한 것처럼 거짓말 한다는 것이었다. 조기용 부사장이 공개했던 엔진이 독학으로 혼자서 개발했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만큼 뛰어났고 당시의 프로그래밍 고수들의 수준을 뛰어넘었기에 질투의 눈빛도 포함됐던 것이다.


 하지만 조기용 부사장은 95년부터 아마게돈, 배틀기어 ,드래곤 투카3D를 연속적으로 프로그래밍하여 자신의 진가를 확실히 증명시킨다. 특히 3D 그래픽 커뮤니티 프로그램인 카페나인은 아직도 명작으로 인정받는다. 공식적으로는 뮤가 한국최초의 3D MMORPG라면 카페나인은 세계최초의 3D 온라인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최초라는 수식을 달면서 다양한 게임을 개발했던 조기용 부사장이지만 그도 한때는 폐인 아닌 폐인생활을 해야만 했다. 98년 김남주 사장과 함께 공동으로 게임 개발을 약속하면서 무려 2년 여간이나 집안에서 폐인생활을 했던 것이다. 김남주 사장과 조기용부사장은 사무실을 차릴 돈이 없었기 때문에 오직 게임 개발에 대한 일념 하나로 각자의 집에서 작업을 했던 것이다.


조기용 부사장은 프로그래밍 전부를 담당했고 김남주 사장은 그래픽 전부를 담당했다. 가능하면 둘은 차비와 커피값을 아끼기 위해서 만나지 않고 대부분 이메일과 채팅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조기용 부사장이나 김남주 사장은 이때의 공백기가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말한다.


김남주 사장과 조기용 부사장은 가능한 빨리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3D 슈팅게임 만들자고 하였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3D 슈팅게임 프로젝트는 시장성이 부족하다는 생각으로 폐기시킨다. 그 후1년 동안 무려 네 가지의 게임을 개발 완료하였다고 하니 대단한 개발 열정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것도 월급 한푼 안받고 집안에서 독수공방하며 제작을 했으니 그들이 얼마나 절실했었을까 싶기도 하다.


 문제는 1999년도만 해도 3D 그래픽의 보급율이 저조한 상태였기 때문에 게임의 수요층이 너무 적었다. 결국 조기용 부사장과 김남주 사장은 팔릴만한 게임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을 했고 3D MMORPG 게임이 블루 오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게임에 대한 확신이 생기자 2년간의 두문불출을 끝내고 2000년 5월에 전격적으로 사무실을 얻는다. 1999년 말에 서버 프로그래머로 송길섭 CTO를 개발팀에 합류시켰고 바로 이때 미리내 소프트에서 알고 지냈던 이수영씨를 경영자로 영입한다. 삼고초려 끝에 데려온 이수영씨는 개발자의 돈을 한 푼도 각출하지 않고서 충분한 개발자금을 확보하는 능력을 발휘한다.
그 후 2001년도에 뮤를 서비스하기 시작하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고 2001년도 11월 19일부터 상용화에 돌입하여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 이후에는 알다시피 코스닥 대박신화를 이루며 2백억대의 자산가로 조기용 부사장은 거듭난다.

 

가장 드라마틱한 성공의 주인공

 

 웹젠의 조기용 부사장은 아마 한국 게임 크리에이터중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성공스토리의 주인공이 아닌가 깊다. 다른 게임 크리에이터개발자들은 명문대학 출신으로 게임에서 실패해도 다른 것으로 먹고 살수 있는 환경이 있었다. 대개의 성공한 개발자들을 보면 부모님도 아주 잘 만났고 명문대 출신답게 선후배들도 사회에서 잘나가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취업 부탁을 하면 일자리 정도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강철이라고 과거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던 정치인이 있다. 일반적으로 서울 명문대 출신들이 민주화 운동을 하면 대부분 조기에 가석방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유독 경북대 출신인 이강철씨는 형기를 다 마치고서야 형무소에서 풀려났다고 한다. 그 이유를 찾아 봤더니 같이 민주화 운동을 하고 같이 감옥에 갇혔던 친구들은 검사나 변호사 같은 선배나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서 집행유예로 풀려 났지만 이강철씨는 그런 도움을 받을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사실 이러한 현상이 게임계에도 존재한다. 개발자들의 인맥을 면밀히 찾아 보면 알게 모르게 얽히고 설킨 관계를 쉽게 찾아 낼 수 있다. 개발 자금을 제공하는 사람과 개발을 하는 사람 사이에는 대학 선후배 관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사이가 많다. 게임 개발에서 실패를 했어도 다른 분야로 전직 할 수 있는 선후배 인맥이 든든하게 안전망으로 존재하고 있다.


실제로 성공한 게임사들을 보면 어렵고 힘든 극적인 순간에 학교선배로부터 급전을 얻는 등의 도움을 받은 사례들이 많다. 하지만 조기용 부사장은 그런 인맥자체가 없었다. 조기용 부사장은 게임이라는 분야에서 성공하지 않으면 생계자체가 어려울 수도 있었다. 그래서 조기용 부사장은 게임이라는 분야에서 승부를 걸어야 했다.
실제 조기용 부사장은 뮤에 자신의 인생을 올인 한 것이었다. 월급도 받지 않고서 현재의 김남주 사장 그리고 송길섭 CTO는 그야말로 폐인생활을 하면서 게임개발에 몰두하였던 것이다. 월요일 출근에 토요일 퇴근이라는 살인적인 개발 스케쥴속에서 불굴의 의지를 불태우면서 완성한 것이 바로 뮤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 세 명의 개발자가 8개월 만에 한국 최초의 3D MMORPG 게임인 뮤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말 독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그들이 그토록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게임 개발에 총력을 기울인 것은 성공에 대한 절실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알려졌듯이 조기용 부사장은 전문대 중퇴이고 김남주사장과 송길섭 CTO는 고졸이었다.


이들 3인방 에게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오직 게임에 대한 열정과 실력뿐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열정과 실력을 증명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증명의 결과물이 뮤이다. 뮤의 성공으로 웹젠은 직원수 557명의 국내 제 2위의 게임 회사로 거듭났다. 
하지만 조기용 부사장은 아직도 초심을 잃지 않고 있다. 조기용부사장은 뛰어난 프로그래머이기는 하나 천재형은 아니다. 그대신 모르는 것이 있으면 절대 부끄러워하지 않고 궁금증이 풀릴 때까지 공부하는 스타일이다. 그 대상이 고등학생일지라도 자신이 배울 점이 있다면 망설이지 않고 끝까지 찾아서 물어보는 것이 바로 조기용 부사장이다.


하지만 조기용 부사장은 받아들이는 속도가 빠르다고 한다. 처음에는 늦지만 한번 자신의 페이스를 찾기만 하면 급속도로 발전 되어서 처음 가르쳤던 사람의 실력을 금방 능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한다.
사실 요즘 웹젠은 창사이래 최고의 위기를 맞고 있다. 2005년 이후 적자를 기록하고 있고 내년 상반기까지 적자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뮤 이후에 회사의 새로운 성장 동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조기용 부사장의 새로운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웹젠의 위기는 관리자로 변신한 조기용 부사장의 초기 학습단계의 일시적인 위기가 아닌가 싶다. 조기용 상무가 처음 배우는 것은 느리지만 한번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기 시작하면 가장 빨리 적응하는 능력을 보여 왔다. 조기용상무가 처음 게임계에 입문할 때처럼 초심을 잃지 않고 빠른 학습과 응용능력을 경영에서도 선보인다면 웹젠의 지금 위기를 벗어나 새로운 성공신화를 그려갈 것이다. 그래서 게임은 학력보다는 실력이라는 것을 꼭 증명해주기를 바란다.

 

주요 대표작

1995년 이즈미르
1996년 아마게돈
1996년 배틀기어
1998년 까페나인
2001년 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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