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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빌 게이츠는 마이크로소프트를 무너뜨리는 방법이 아주 간단하다고 밝힌 바 있다. 즉 마이크로소프트의 핵심 인물 30명만 뽑아서 새로 회사를 창업하면 마이크로소프트는 그 회사에 의해 망하고 말 것이라고 단언한 것이다. 결국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거대 기업을 상대로 이길 수 있는 것은 바로 인재라는 뜻이다. 기업 간 경쟁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인재끼리의 경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빌 게이츠는 30명의 핵심인물을 말하고 있지만 실리콘밸리의 성공 스토리를 따라가다 보면 회사의 가장 최상위층에 있는 3인의 리더가 결국 회사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마이크로소프트의 경우 소프트웨어 전문가인 빌 게이츠는 미래에 대한 비전과 리더십이 뛰어난 인물이며 여기에 하드웨어 전문가 폴 알렌이 있다. 하지만 기술지향적인 두 사람만으로는 회사가 제대로 운영될 수 없다. 사원들에게 주는 급여계산도 제대로 못해서 노동청에 신고를 당할 정도였다. 


결국 좀더 체계적으로 사업을 운영할만한 사람이 필요했고 오늘날 마이크로소프트의 CEO인 스티브 발머가 영입됐다. 그는 빌 게이츠와 같은 하버드 대학교 출신으로 스탠포드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미국의 대표 기업인 P&G에서 근무하며 사업 이론과 실무를 제대로 익힌 뛰어난 경영 전문가였다.


이렇게 마이크로소프트는 빌 게이츠가 회사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며 조직을 통제하고 폴 알렌이 회사의 기술 발전과 연구에 매진하는 동안 스티브 발머가 회사의 재무와 경영 그리고 마케팅을 책임지는 삼두 체제의 운영 형태를 갖추게 된다. 회사의 삼두체제는 비단 마이크로소프트만의 특징일 뿐만 아니라 실리콘밸리의 모든 벤처기업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인 모습이다.


이러한 삼두체제 형태의 운영은 실리콘밸리 신화의 원조인 인텔에서부터 시작된다. 원래 인텔의 창업자는 페어차일드 반도체를 다니던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 두 사람이었다. 이 둘이 함께 회사를 새롭게 차린다고 소문이 나자 반나절 만에 창업자금이 모두 마련될 정도로 그들은 이미 반도체 업계에서 최고라는 소리를 듣던 유명인사였다. 인텔을 창업한 후 로버트 노이스는 CEO가 되어 회사를 경영했고 고든 무어는 연구 개발에 힘썼다. 하지만 조직 관리에 허점이 있었는데 이를 메워 준 인물이 바로 앤디 그로브이다.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조직을 장악한 앤디 그로브는 오늘날 인텔의 철학과 문화를 창조한 인물이다.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 앤디 그로브로 이어지는 삼두체제는 이후 벤처기업 운영의 가장 일반적인 성공 모델이 되었다.


 실리콘밸리에서 벤처 캐피탈로부터 투자금을 받을 때는 아이디어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회사에 삼두체제가 잘 갖춰져 있어야 한다. 만약 회사에서 핵심 3인의 조직관리, 경영, 연구개발이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갖추고 있지 않다면 투자를 하는 벤처 캐피탈에서 필요한 인력을 뽑아 주기도 한다.




이와 같은 사례 가운데 대표적인 회사가 구글이다. 미국 벤처 캐피탈의 양대 산맥 클라이너 퍼킨스와 세쿼이아 캐피탈이 각각 1,250만 달러의 거액을 구글에 투자하면서 요구한 유일한 조건이 바로 창업자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에게 부족한 사업 마인드를 보완할 CEO의 영입이었다.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와 같이 래리 페이지는 조직 관리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고 세르게이 브린은 폴 알렌처럼 기술적인 부분에 더 치중했는데 이 둘 역시 엔지니어 출신인 만큼 스티브 발머와 같은 전문 경영자가 필요했다. . 사실 래리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전문경영인의 영입은 필요 없다고 강하게 주장했었다. 하지만 결국 고심끝에 구글은 수 많은 면접을 통해서 노벨의 전문 경영인이었던 에릭 슈미트를 CEO로 영입한다.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 에릭 슈미트로 이어지는 삼두체제가 완성되자 이후 회사는 비약적인 성공을 거둔다.


일단 마음이 맞는 친구와 동업한 후 경영과 마케팅에 밝은 인물을 영입하는 실리콘밸리의  성공 방정식은 애플도 예외가 아니었다. 조직 관리의 마술사 스티브 잡스와 기술 개발의 천재 스티브 워즈니악, 경영과 마케팅의 조율자 마이크 마큘라로 이어지는 삼두체제의 완성이야 말로 애플 성공 신화의 시작이었다. 닌텐도 역시 그들의 성공 뒤에는 조직을 장악했던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과 기술 개발에 힘쓴 요코이 군페이, 세계 시장 진출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경영과 마케팅 전문가 아라카와 미노루와 같이 탄탄한 삼두체제가 있었다.


그런데 애플과 닌텐도가 어려움을 겪는 과정을 살펴 보면 바로 이 삼두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85년 스티브 잡스가 회사에서 쫓겨난 후 애플은 스컬리가 회사 조직을 운영하고 장 루이 가세가 연구 개발을 지휘했으며 마이클 스핀들러가 마케팅을 맡는 삼두체제를 구성했다. 스티브 잡스가 남겨준 매킨토시라는 효자 종목 덕분에 그들은 몇 년간 호황을 누리기도 했지만 이들 애플의 핵심 3인방은 미래의 새로운 먹거리 창출에는 능력이 부족했다.


빌 게이츠는 스컬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매킨토시의 그래픽 기반 운영체제 맥OS를 다른 컴퓨터 제작 업체들에게 라이센스를 주면 더 많은 이득을 얻을 것이라고 조언하지만 스컬리는 그의 의견을 단번에 묵살한다. 만약 스컬리가 빌 게이츠의 제안대로 맥OS의 라이센스를 컴퓨터 업체에 주었다면 지금의 세상은 윈도우가 아닌 맥OS의 시대가 되었을 수도 있다. 결국 당시의 스컬리가 거절한 일은 애플뿐만 아니라 컴퓨터 역사상 가장 어리석은 판단으로 회자된다. 스컬리와 장 루이 가세 그리고 마이클 스핀들러로 이어지는 애플 삼인방은 이밖에도 많은 연구비가 들어간 PDA 뉴튼이나 매킨토시의 과도한 마진율 55% 고수 정책 등 전략적인 실수를 반복한다. 스컬리가 회사를 그만 둔 후 뒤이어 새롭게 구성한 경영진들 또한 실망스러운 행보를 이어가기는 마찬가지였다. 


닌텐도 역시 요코이 군페이가 버추얼 보이라는 신개념의 게임기를 개발했으나 시장에서 처참하게 실패하고나서 회사를 그만 둠으로써 사실상 삼두체제가 와해되고 만다. 비록 닌텐도는 야마우치 히로시의 강력한 원맨체제로 운영되고 있었지만 그런 그에게 서슴없이 직언을 할 수 있는 인물이 바로 요코이 군페이였다. 요코이 군페이는 울트라 핸드로 부도 위기의 회사를 구해내고 게임위치로 닌텐도를 게임 회사로 거듭나게 한 인물이다. 특히 패미컴과 슈퍼 패미컴이 성공하는데 일조한 일등공신이었기 때문에 야마우치 히로시는 요코이 군페이 말에 절대적인 신뢰를 보냈었다. 하지만 그런 그가 회사를 그만 둔 후 회사의 삼두체제는 급격하게 무너진다.


 닌텐도에서 야마우치 히로시에 대한 견제와 균형 추와 같은 역할을 하던 요코이 군페이가 사퇴한 후 야마우치 히로시의 독선적인 경영은 더욱 심해져서 이후 닌텐도는 많은 전략적 실수를 반복하게 된다. 이를 테면 게임을 하던 아이들이 성장해서 어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이들만을 위한 게임을 발매해서 닌텐도는 아이들만을 위한 회사라는 이미지를 고수했다. 결국 이로 인해서 성인의 고객층들이 닌텐도가 아닌 새로운 게임기를 찾아 떠났다. 그 밖에 회사의 연구 개발을 책임진 요코이 군페이의 빈자리로 인하여 닌텐도는 3D와 네트워크 같은 신기술의 경쟁에서도 다른 회사에 뒤쳐지기 시작한다.



결국 마이크로소프트에 의해 애플과 닌텐도가 큰 위기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꺼내든 카드는 역시 삼두체제의 재편성이었다. 1985년 회사에서 쫓겨난 스티브 잡스가 1997년 새롭게 애플에 컴백하면서 새로운 삼두체제를 구성한다. 2008년 현재 애플은 스티브 잡스가 회사에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성취하도록 조직을 장악하고 있으며 필 쉴링이 마케팅과 경영을 책임지고 팀 쿡이 효율적으로 제품의 제작과 유통을 담당하는 삼두체제가 이뤄졌다.


닌텐도 역시 2002년에 야마우치 히로시가 큰 결단을 내리는데 기존의 야마우치 히로시 원맨체제를 벗어나 집단 지도 체제를 이루는 것이다. 현재 닌텐도에서 주목해야 할 삼두체제는 사장 이와타와 전무 미야모토 시게루, 그리고 미국의 지사장 레지 필스 아이메이다. 프로그래머 출신인 이와타 사장은 회사의 기술 개발을 담당하며 미야모토 시게루는 조직을 장악해서 게임을 개발하고 레지 필스 아이메는 마케팅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하지만 삼두체제에서 주의할 점은 직위보다 조직을 책임진 사람이 가장 강력한 파워를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직접 개발 인원을 총괄하며 지시를 내리는 역할이기 때문에 회사를 장악해서 휘어 잡을 수 있어야 한다. 인텔의 로버트 노이스는 경영에 바빠 직원들 얼굴도 제대로 몰랐지만 조직을 담당한 앤디 그로브는 이 회사의 직원이라면 벌벌 떠는 카리스마형 리더였다.


그래서 오늘날 인텔의 성공을 언급할 때 창업자이자 초대 대표였던 로버트 노이스나 두 번째 대표에 오른 고든 무어보다도 창립 멤버이자 세 번째 CEO인 앤디 그로브를 가장 첫 손에 뽑는다. 이는 앤디 그로브가 조직을 완전히 장악하고 성공하는 기업 문화를 창조했기 때문이다. 구글에서도 CEO인 에릭 슈미츠보다 오히려 조직을 직접 총괄하는 래리 페이지가 가장 발언권이 쎄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경매 사이트 이베이에서도 대외적으로는 CEO인 맥휘트먼의 이름이 잘 알려져 있지만 창업자이자 조직 운영을 맡은 피에르 오미디에르가 실질적인 리더라고 볼 수 있다. 애플은 CEO인 스티브 잡스가 조직을 관할하는 만큼 그의 강력한 파워는 말할 것도 없으며 닌텐도 역시 실세는 단연 조직을 통제, 관리하는 미야모토 시게루이다. 실제로 스티브 잡스와 미야모토 시게루는 애플과 닌텐도의 전성기를 이끌기도 했으며 부활의 선봉장이기도 하다.


새롭게 애플로 돌아온 스티브 잡스는 과거와 확실히 다르게 변해 있었다. 1985년 스티브 잡스가 애플에서 쫓겨날때만 해도 감정하나 제대로 컨트롤 못하는 고집불통의 젊은이라는 평가를 들어야 했다. 회의시간에는 남들에게 발언권을 주지도 않고 화이트 보드앞에서 일방적인 지시를 내리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직원의 반박을 듣기라도 하면 불같이 화를 내며 가차없이 직원을 해고하기 까지했다. 제품개발의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자신의 결정에 따르도록 강요하던 스티브 잡스는 그로 인해서 직원들로부터 평판도 갈수록 나빠졌다. 그러한 독불장군이었던 스티브 잡스가 1997년 애플로 들어오자 그는 한층 성숙되고 업그레이드 되어 있었다. 그가 1985년 애플에서 나간 뒤 세운 회사 넥스트는 실패를 거듭하는데 이 과정에서 도도하던 성격의 스티브 잡스가 겸손을 배웠고 또 세계 최초의 장편 영화 토이 스토리의 제작사 픽사의 CEO로 큰 성공을 거두면서 여유로움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변기의 물 내릴 시간도 없을 정도의 일중독자로 묘사되던 스티브 잡스는 결혼 이후 삶의 균형을 찾으며 가족 안에서의 행복을 누리고 있었다.


97년 애플로 돌아온 스티브 잡스는10여년간의 다양한 경험을 통하여 자애로운 후원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주장을 세울 때와 뒤로 물러설 때를 정확하게  알았다. 픽사에서 천재 감독 존 라세터를 발굴해 토이 스토리 제작의 전권을 주었던 그는 애플에서 디자인에 천재적인 감각을 지닌 조나선 아이브에게 파격적인 대우와 권한을 넘겨준다. 스티브 잡스는 때때로 조나선 아이브와 전체적인 디자인 비전에 대해서만 공유할 뿐 개발 과정은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그의 변화된 모습은 신제품으로 개발한 뉴 아이맥의 디자인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뉴 아이맥의 모형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스티브 잡스는 예전처럼 불같이 화를 내는 대신 디자인 팀을 돌려 보내고 다음날 아침 조나선 아이브를 집에 초대한다. 그리고 그의 부인이 가꾸어 놓은 꽃밭을 함께 산책하며 이 꽃들은 불필요한 부분이 하나도 없다고 얘기하면서 뉴 아이맥의 디자인도 바로 그래야 한다고 충고한다. 스티브 잡스의 말 한마디에 조나선 아이브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고 역시 애플은 사상최고의 디자인이라는 뉴 아이맥 G4를 개발한다. 오늘날 애플의 역사를 새롭게 쓴 아이포드 개발 과정에서도 파델이 개발 과정을 주도하고 스티브 잡스는 중요한 포인트만 잡아 주는 역할을 한다.


또 항상 주목 받기 좋아해서 매킨토시의 개발 과정에서도 혼자 언론을 독점하려고 해서 팀원들의 반발까지 샀었다. 하지만 지금의 스티브 잡스는 언론 인터뷰의 대부분을 필 쉴링이라는 마케팅 최고 책임자에게 맡기고 본인은 중요한 행사 때만 나선다. 그래서 요즘에는 스티브 잡스를 인터뷰하기 힘들어서 신비주의 마케팅이라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이다. 


그리고 스티브 잡스는 회사의 비용 계산과 개발에 있어서도 최고 운영 책임자 팀쿡에게 일임하고 있다. 스티브 잡스가 췌장암으로 몇 달간 회사를 비운 적이 있었는데 당시 스티브 잡스가 없는 애플에 대한 우려로 주식이 폭락할 정도였다. 하지만그는 이미 회사 내에 자신의 기업 철학 및 비전을 공유할 핵심 인재들에게 많은 권한을 물려준 덕에 무리 없이 회사가 운영됐다. 독불장군 스타일의 스티브 잡스에서 자애로운 후원자로 변신한 그는 회사 내에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시스템에 따라 회사를 운영하는 노련함까지 갖춘 CEO로 업그레이드 한다. 과거에 애플의 회의란 거울을 보고 자문자답하는 스티브 잡스의 모습과도 같다고 하였지만 이제 스티브 잡스는 다른 사람의 말을 잘 경청할 줄 아는 훌륭한 경영자라는 의미에서 탑리스너라는 격찬까지 듣고 있으니 확실히 그는 과거의 스티브 잡스와는 달라졌다.


애플이 스티브 잡스의 변신과 활약으로 부활의 단초를 마련했듯이 닌텐도도 역시 비전을 제시하고 조직을 통제하는 미야모토 시게루가 닌텐도의 변화를 주도했다. 미야모토 시게루는 우리에게 슈퍼 마리오와 젤다의 전설로 잘 알려진 게임 디자이너이다. 특히 슈퍼 마리오 시리즈는 지금까지 1억 7천만 개를 판매해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게임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된다. 음악 하면 비틀즈를 떠올리고 영화 하면 스티브 스필버그를 연상하듯이 게임 하면 사람들은 미야모토 시게루를 첫 번째로 꼽는다. 사실 비틀즈의 리더였던 폴 메카트니는 콘서트를 위해서 일본을 방문한적이 있었는데 이때  관계자에게 가장 먼저 요청한 것이 미야모토 시게루와의 저녁식사였다. 폴 메카트트니는 미야모토 시게루와 만난 후 사인까지 받아갈 정도로 팬이였다. 또한 스티븐 스필버그는 게임 전시회 E3에서 닌텐도의 부스를 방문한 후 미야모토 시게루와 함께 게임을 같이 즐기며 그에 대해 칭찬을 아까지 않았다. 한국에는 미야모토 시게루에 대한 존재가 별로 크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국에서 그의 연설을 들으려고 수천 명의  인파가 몰려 그 줄을 캠코더로 찍는 데만 수십 분이 걸릴 정도다.


또 영국에서는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사인회 다음 날 같은 장소에서 그의 사인회를 가졌는데 훨씬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언론은 물론 미야모토 시게루 본인도 놀랐다고 한다. 동키콩으로 이미 세계적인 반열에 올랐던 그는 야마우치 히로시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특히 마리오와 젤다의 전설의 성공 이후 야마우치 히로시는 미야모토 시게루를 회사의 중역으로 승진시키려 하지만 미야모토 시게루가 극구 이를 거절한 적이 있다. 


미야모토 시게루는 성공이나 명예보다 게임 만드는 일 그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미야모토 시게루는 그가 만약 회사 임원이 되면 게임 제작 현장에서 멀어지기 때문에 스스로 만년 과장의 길을 택한다. 그의 실적만 봐도 초고속 승진이 당연했지만 미야모토 시게루는 10년 동안 과장을 지내고 다시 10년 넘게 부장을 지내면서 끝까지 게임 개발의 현장에서 일하려고 했다. 사실 스티브 잡스도 1985년 회사를 그만둔 이유가 자신을 개발 팀장에서 밀어내고 회장으로 승진시킨 뒤 현장에서 실무를 담당하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미야모투 시게루나 스티브 잡스 모두 그 누구보다 개발에 대한 욕심이 많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야마우치 히로시가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인물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의해 스스로 퇴진을 결정하자 미야모토 시게루는 어쩔 수 없이 회사에서 전무 직책을 맡게 된다. 이때 야마우치 히로시는 회사의 변화를 꾀하기 위해 과거 원맨체제와 상반된 6인의 집단 지도 체제를 구성하는데 대표권을 행사하는 이 6인의 집단 지도 체제는 상하관계에 의해 업무를 지시하고 받는 관계가 아니라 회사의 여러 사안에 대해 상호 존중하면서 가능하면 의견을 통합하여 결정하도록 결성된 시스템이었다.


모든 것을 야마우치 히로시 혼자 판단하고 결정하던 때와 완전히 다른 시스템이 구축된 것이다. 새롭게 임명된 사장 이와타 사토루만 해도 야마우치 히로시와 상반된 스타일로 카리스마형 리더라기 보다 부드럽고 온화하게 사람들의 화합을 이끌어내는 스타일로 6인의 집단 지도 체제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적합한 인물이다. 그는 외부의 써드파티와 아웃소싱 문제를 담당한다.


미야모토 시게루는 전무로 승진해서도 여전히 현장에서 직접 게임 제작을 지휘한다. 단 달라진 점이 있다면 과거에는 하나의 개발팀만 맡았지만 지금은 거의 모든 프로젝트에 관여하고 게임 소프트웨어 개발뿐만 아니라 게임기와 같은 하드웨어 제작도 담당하게 된 것이다. 그는 게임 디자이너 출신이었던 만큼 게임기의 기술과 성능에 매달리기 보다 자신의 아이디어와 재미를 구현할 수 있는 게임기 개발에 초점을 맞춘다. 이는 닌텐도로 보면 대단히 중요한 발상의 전환으로 그동안 그래픽 성능의 향상이야말로 게임기 개발의 첫번째 과제였는데 미야모토 시게루는 이런 일반적인 관념부터 타파하였다. 그는 그래픽이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재미를 창조하고자 했다. 그의 이런 노력들이 현재 닌텐도 부활의 선봉격인 닌텐도 DS와 위(Wii) 개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삼성 이건희 회장은 한 명의 천재가 십만 명을 먹여 살린다고 말하여 많은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는데 스티브 잡스와 미야모토 시게루의 경우만 놓고 본다면 이건희 회장의 이야기는 신빙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십만 명의 사람이 모여서 머리를 짜내도 스티븐 스필버그 한 사람이 만든 영화를 따라갈 수 없고 비틀즈처럼 오랫 동안 대중에게 사랑 받는 음악을 만들 수 없다. 또 그들이 창조한 영화와 음악은 실제 수십만 명을 먹여 살리고 있다. 무엇보다 스티브 잡스가 없었다면 애플은 절대 부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애플에 새로운 CEO로 임명해봐야 스스로 엘리트라고 생각하는 직원들이 CEO마저도 무시하기 일수였지만 스티브 잡스는 그런 조직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장악했다. 바닷가에 흩어져 있는 모래알 같은 팀웍을 한대로 모아놓을 수 있는 것은 사람을 다루는 탁월한 카리스마와 천재적인 용인술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었다. 미야모토 시게루 역시  아타리 쇼크로 인해 게임 산업이 완전히 망했지만 슈퍼 마리오로 게임 산업을 부활시켰고 이 덕분에 게임의 신이라는 호칭까지 듣는다. 십만 명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머리를 짠다 해도 미야모토 시게루처럼 훌륭한 게임을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오늘날 영화 산업을 능가하는 황금 산업으로 인정받는 게임 역시 미야모토 시게루의 공로가 절대적인 역할을 했음을 생각하면 확실히 한 명의 천재가 십만 명 아니 그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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