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슈퍼마리오와 젤다의 전설의 아버지 게임의 신 미야모토 시게루 1편 - 비디오 게임의 탄생과 아타리 쇼크





비디오 게임을 대중화시킨 사람은 아타리의 창시자 놀란부쉬넬이다. 그는 퐁을 상업적으로 대히트 시킴으로써 비디오 게임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얻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놀란 부쉬넬 이전에도 컴퓨터 게임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런데 누가 최초로 컴퓨터 게임을 어떻게 왜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역사학적인 관점에서 최초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자면 핵물리학자인 윌리엄 히긴 보텀(William Higinbotham)이 컴퓨터 게임의 창조자라고 불린다. 1950년대만 해도 컴퓨터는 핵무기 개발을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여서 많은 사람들에게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컴퓨터라는 단어를 들으면 사람들은 곧 핵폭탄의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일종의 괴물처럼 생각했다. 윌리엄 히긴 보텀은  컴퓨터에 대한 그런 이미지를 바꾸고자 뭔가를 만들고 싶었다.   사람들이 컴퓨터를 통해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만든 것이 바로 테니스 포 투(Teniss for Two)이다.

1958년에 발표된 이 게임은 전기 신호를 측정해서 화면에 보여주는 오실로스코프장치를 이용하여 게임 그래픽 화면을 보여주도록 했으며 조작은 레버모양의 스위치를 움직이도록 하였다. 테니스포 투는 연구소에 전시되어서 관람객들에게 높은 인기를 얻었지만 안타깝게도 그것 뿐이었다. 윌리엄 히긴보텀은 게임에 대한 특허 등록도 하지 않았으며 상업적인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테니스 포투는 연구실 한켠에 전시되고나서는 서서히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져 갔다. 이 같은 사실은 1982년 이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에게 밝혀지지 않은 역사였다. 
그전에 최초의 게임은 스티븐 러셀의 스페이스 워(SPACE WAR)로 인정 받았었다.



하지만 1982년 미국의 Creative Computing 잡지의 심층 발굴 조사의 결과로 겨우 테니스 포 투의 존재가 전세계에 알려졌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게임의 최초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최초 그자체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윌리엄 히긴 보텀이 게임을 만든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후세에 끼친 영향을 생각해서 스티븐 러셀이 최초라는 사람도 많다. 왜냐하면 아타리의 창업자로 퐁을 개발하여 비디오 게임의 아버지로 불리기까지 하는 놀란 부쉬넬이 바로 스티븐 러셀이 만든 스페이스 워를 보고서 게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스티븐 러셀은 테니스 포 투가 있었는지도 몰랐다. 스티븐 러셀의 스페이스 워는 그가 MIT 대학교에 다닐 때 만든 게임이다.  당시로써는 최신의 컴퓨터였던 PDP-1(Programmed Data Processor-1)이 들어오자 많은 학생들이 이 새로운 기계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특히 스티븐 러셀과 친구들은 그 컴퓨터로 남들이 하지 못한 멋진 무엇인가를 개발하고 싶었다. 스페이스 워가 개발 되던 당시에는 소련과 미국이 우주에 위성을 쏘는 경쟁을 하였다. 그래서 사회문화 전반에 우주를 테마로한 소설과 영화등이 인기였다. 스티븐 러셀은 우주를 소재로 해서 게임을 만들기로 결심했고 그래서 탄생한 게임이 바로 스페이스 워다.
 
하지만 게임에 대해서 정식으로 특허를 내고 상품화하여 판매까지 한 사람은 랄프 베어이다. 그는 1972년 특허를 받았으며 오디세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최초의 가정용 게임기를 판매하기까지 하였다. 초기에 상업적으로 성공하는가 싶었지만 결국 실패의 늪에 빠져든다. 놀란 부쉬넬이 퐁을 들고 나오면서 대히트를 하게 되고 랄프베어는 곧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만다. 
 
놀란 부쉬넬이 처음 게임을 접한 것은 유타대학교 재학시절이었다. 스페이스 워는 상업적인 용도로 만든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누구나 자유롭게 게임을 복사해서 플레이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당시는 컴퓨터라는게 대학 연구소에나 있을 정도로 귀하던 시절이었다. 놀란 부쉬넬은 유타대학교에서 컴퓨터 그래픽을 공부하고 있다가 대학교의 실습실에서 스페이스 워를 발견하고 게임에 쏙 빠졌다. 졸업후에 전자 회사를 다니던 그는 컴퓨터 기술이 혁명적으로 발전하게 되자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게 된다. 놀란 부쉬넬이 대학교를 다닐때만해도 컴퓨터 하면 실험실 전체 벽을 차지하는 거대한 크기였다. 하지만 트랜지스터가 발명되고 나서 컴퓨터의 속도는 갈수록 작아졌다. 놀란 부쉬넬은 작은 책상 크기만하면 스페이스 워와 같은 게임을 만들수 있을 정도로 기술이 발전했다는 점을 알게 되자 회사를 퇴직하고 아타리를 창업한다. 1971년 주차장을 개조한 작업장에서 놀란부쉬넬은 세계최초로 동전을 투입해서 게임을 실행하는 컴퓨터 스페이스를 개발한다. 컴퓨터 스페이스는 스티븐 러셀이 개발한 스페이스 워를 모방해서 상업용으로 변형시킨 게임이었다. 놀란 부쉬넬은 컴퓨터 스페이스가 세계를 깜짝놀래킬 정도로 크게 성공할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고작 2500대를 판매해서 3만달러를 버는 정도에 그쳤다.  당시 사람들은 컴퓨터가 뭔지도 몰랐고 게임이란 것은 접해본 적도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간단한 조작법이었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스페이스가 너무나 어려웠기 때문에 별로 인기를 끌수 없었다. 
 
 


 
실패의 원인을 어려운 조작법이라고 생각한 놀란 부쉬넬은 사람들이 플레이하기에 쉬운 게임을 구상했다. 그때 마침 버클리 대학을 졸업한 알알콘이라는 사람이 회사에 들어온다. 놀란 부쉬넬은 알알콘의 실력을 테스트해보고자 탁구를 소재로 해서 게임을 만들라고 지시한다. 신입사원인 알알콘은 놀란부쉬넬의 일방적인 지시사항에 뭐가 뭔지도 모르고 게임을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는 불황이라서 다른곳에 가면 취직이 된다는 보장도 없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며칠간 야근을 하면서 겨우 게임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사장이 만들라고 하니 억지로 만들긴 만들었는데 정말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게임이 너무나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알알콘이 만든 게임을 플레이한 놀란 부쉬넬과 아타리의 직원들은 그 게임에 쏙 빠져들었다. 그리고 1972년 이게임은  퐁( 퐁은 탁구를 뜻하는 영어의 핑퐁에서 따왔다) 이라는 이름을 달고 발매되어서 세계 컴퓨터 역사에 충격파를 던져주게된다. 이는 전세계에 컴퓨터 게임이것이 퍼져가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퐁의 성공이후 놀란 부쉬넬은 게임의 아버지라는 명성을 얻으며 유명인사가 된다. 그리고 그는 불과 500달러에 창업한 아타리를 1976년 영화사 워너 커뮤니케이션에 2500만달러에 판매하며 천만장자의 반열에 오른다.
 
 
아타리는 1977년 가정용 게임기인 아타리 2600 VCS를 발매하며 세상을 다시한번 놀래킨다. 
아타리 2600의 발매초기만 해도 판매량은 매우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1979년 크리마스 시즌을 기점으로 해서 일본 타이토사에서 개발한 인기 게임인 스페이스 인베이더가 발매된 1980년도에 이르기까지 아타리 2600은 폭발적인 판매량을 기록해서 전세계적으로는 2500만대라는 큰성공을 거두게 된다.  
 
놀라운 판매량 덕분에 아타리는 1980년도에 수익이 2억달러가 넘었으며 이는 아타리의 모회사 워너 커뮤니케이션 역사상 최고의 이익금이었다. 그래서 이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워너커뮤니케이션의 아타리 인수를 성공으로 보았다. 하지만 단 3년만에 상황은 극적으로 반전되었다. 1983년 아타리는 미국 산업 역사상 최고액인 5억 3600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한것이다. 아티리가 갑작스럽게 손실을 입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두개의 게임 때문이었다. 1982년 아타리는 전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한 ET를 소재로 게임을 개발했다. 아타리는 인기영화인 ET의 판권을 구입하기 위해서 과도한 금액을 로열티로 먼저 집행한다. ET 판권에 들어간 돈을 회수하고자 아타리는 정작 게임 제작비를 줄이는 우를 범한다. 이로 인해서 게임의 질은 형편없이 떨어져 버린다. 그리고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성공을 확신하고 무리하게 게임 ET의 게임카트리지를 대량으로 미리 찍어둔다. 또한 오락실에서 대히트한 팩맨도 성공을 예감하고 게임카트리지를 대량으로 역시 미리 찍어둔다. 게임이 발매됐는데 없어서 못파는 경우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란것이다. 
 
 

하지만 수요예측은 완벽히 벗어났고 아타리의 희망이었던 ET와 팩맨은 끔찍한 재앙이 되어버렸다. 두 게임의 판매량은 참혹한 수준이었고 미리 만들어진 카트리지는 고스란히 재고로 남게 되었다. ET와 팩맨의 실패는 아타리의 몰락뿐만 아니라 게임시장 전체가 풍비박산이 되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ET와 팩맨이 아타리 쇼크의 직접적인 계기이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아타리의 몰락이 예견되고 있었다. 워너 커뮤니케이션의 보수적인 관리문화가 아타리와 융화되지 못했다. 아타리가 인수된 후에 회사내에는 창의적인 개발 분위기가 사라지면서 독창성과는 거리가 먼 획일적인 게임들만 판을 치기시작했다. 이 때문에 소비자들로부터 게임은 외면 받기 시작했는데 결국 ET와 팩맨은 얼어붙은 시장에 찬물을 부은 격이었다. 
 
82년 크리스마스 시즌부터 83년까지 미국의 게임 도매상들과 소매상들이 차례로 도산하더니 게임 제작 업체들도 연쇄적으로 부도사태가 나면서 게임 산업이 붕괴되기 시작하는데 이를 사람들은 아타리 쇼크라고 불렀다.


<다음편에 계속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