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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의 등에 올라타서 힘을 키우고 결국은 거인까지 쓰러뜨리는 거인 킬러 빌 게이츠의 능력은 애플을 상대할 때도 그대로 드러난다. 거인과 상대하기 위해서는 우선 무엇보다도 거인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애플과 빌 게이츠의 인연은 애플의 요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애플에서는 스티브 워즈니악이 베이식을 직접 만들었기 때문에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이 일할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스티브 워즈니악의 베이식은 정수 연산만 가능하고 분수 같은 부동점 연산이 되지 않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래서 스티브 잡스와 애플 개발자들은 빌 게이츠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때 빌 게이츠는 3만 1천 달러를 받고 직접 애플의 베이식 프로그램을 수정해 주기로 한다.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의 우정은 매킨토시 개발과 함께 시작되었다. 스티브 잡스는 일찍이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매킨토시 개발 단계에서부터 일부러 소프트웨어 업체들과 협력해서 매킨토시를 만들려고 했다. 이때 스티브 잡스는 마이크로소프트와 접촉한다. 당시만 해도 마이크로소프트는 베이식 같은 프로그래밍 언어와 DOS 같은 운영체제를 개발했지만 오늘날 MS 오피스 같은 응용 프로그램으로 사업을 벌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티브 잡스는 직접 마이크로소프트를 찾아가서 매킨토시에 대해서 설명했다. 처음에 빌 게이츠는 스티브 잡스가 설명하는 매킨토시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러자 스티브 잡스는 애플 본사로 빌 게이츠를 초청해서 애플이 만들고 있는 새로운 컴퓨터를 보여주었다. 그 순간 빌 게이츠는 애플이 다시 한 번 미래를 바꾸리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매킨토시가 매우 놀라운 기기라고 생각했기에 스티브 잡스와 적극 협력하길 원했다. 결국 빌 게이츠는 오늘날 엑셀의 오리지널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인 멀티플랜을 매킨토시용으로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빌 게이츠는 애플로부터 도착한 매킨토시의 프로토타입을 SAND(Steve's Amazing New Device)라고 부를 정도로 매킨토시를 사랑했다. 빌 게이츠는 거인에게 필요한 존재였을 뿐만 아니라 거인 자신보다도 더 거인을 더 잘 알고 이해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매킨토시의 매력에 흠뻑 빠진 빌 게이츠와 달리 정작 애플 내부에서 매킨토시 사업부는 냉대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매킨토시 때문에 스티브 잡스는 창업자임에도 불구하고 미운오리새끼처럼 여기저기서 온갖 불만을 들어야 했고 결국 회사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었다.





빌 게이츠는 매킨토시가 분명 세상을 바꾸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에 회사에서 가장 유능한 개발자들을 매킨토시 팀에 배치했다. 매킨토시에 대한 빌 게이츠의 사랑은 갈수록 노골적이 되어갔다. 1983년 스티브 잡스가 주최한 쇼의 무대에 등장한 빌 게이츠는 매킨토시를 극찬한 후 1984년 수익의 절반은 매킨토시에서 기대한다고 말해 관중들의 환호를 받았다. 스티브 잡스 역시 그에 환한 웃음으로 답했다. 

빌 게이츠가 매킨토시 개발에 전력을 쏟은 것은 전략적인 측면이 강했다. 지금은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을 엑셀이 독점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로터스 1-2-3(Lotus 1-2-3)이 시장을 완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로터스 1-2-3은 IBM-PC용으로만 개발되었다. 그래서 빌 게이츠는 로터스 1-2-3이 없는 시장을 노렸다. 엑셀의 원조가 되는 멀티플랜은 IBM-PC는 물론이거니와 애플2에서부터 코모도어64, 라디오섀크 TRS-80,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TI-99/4A 등의 각종 컴퓨터 시스템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그런데 여러 시스템 중에서도 마이크로소프트가 특히 힘을 쏟은 것은 역시 매킨토시였다. 빌 게이츠는 DOS 같은 텍스트 기반의 운영체제가 결국은 매킨토시처럼 그래픽 기반의 운영체제로 바뀌게 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비록 DOS 기반에서는 로터스 1-2-3에게 밀릴 지라도 시대가 변하면 그래픽 기반의 운영체제에서 강한 프로그램이 경쟁에서 승리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매킨토시용 멀티플랜 개발에 힘을 쏟은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의 예측은 정확하게 적중하였다. 1985년 출시된 매킨토시용 멀티플랜이 큰 성공을 거둔 것이다. 덕분에 마이크로소프트는 다른 어떤 컴퓨터 시스템에서보다 매킨토시에서 많은 돈을 벌었다. 매킨토시에서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은 사실상 멀티플랜이 유일했기 때문에 매킨토시가 폭발적인 판매량으로 보급 대수를 늘려가자 멀티플랜 역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한편 스티브 잡스는 매킨토시 개발 초기부터 마이크로소프트가 결국은 애플의 그래픽 운영체제를 베낄 것이라는 생각에 걱정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 1983년 11월 마이크로소프트가 매킨토시를 베낀 윈도우를 발표함으로써 스티브 잡스의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발표에 스티브 잡스는 격노하면서 즉시 빌 게이츠를 회사로 불렀다. 스티브 잡스는 당신을 믿었는데 우리를 배신하고 있다면서 화를 냈다. 이런 격한 상황에서도 빌 게이츠는 평정심을 잃지 않고 오히려 차분한 어조로 스티브 잡스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스티브! 지금 이 상황은 말이야,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 우리에게는 제록스(Xerox)라는 부자가 있었어. 내가 TV를 훔치러 그의 집에 들어갔는데, 당신이 이미 TV를 훔친 것을 내가 알게 된 거지.”

하지만 제록스는 애플에게 백만 달러를 투자할 정도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제록스가 선보인 그래픽 운영체제와 애플의 매킨토시는 큰 차이가 있었다. 이에 비해서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는 매킨토시로부터 더 많은 것을 베꼈다. 스티브 잡스는 화가 났지만 매킨토시의 성공을 위해서 빌 게이츠는 애플에 꼭 필요한 존재였다. 결국 스티브 잡스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고 빌 게이츠는 계속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했다. 



애플에서 마이크로소프트의 활약이 돋보일수록 애플은 주도권을 잃어 갔다. 한번은 애플이 직접 매킨토시용 베이식을 개발한 적이 있다. 제품 출시를 위해서 포장도 하고 몇몇 대학에 샘플을 보내기도 했다. 애플이 맥베이식을 발매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이번에는 빌 게이츠가 화를 냈다. 만약에 맥베이식을 포기하지 않으면 애플2에서 베이식을 철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애플2의 베이식은 마이크로소프트의 기술이 들어갔고 계약은 1985년 만료될 예정이었다. 당시 애플은 애플2 컴퓨터에서 대부분의 수익을 얻고 있었다. 애플2에서 베이식이 없어지면 애플은 치명타를 입는 상황이었다. 결국 애플은 이번에도 할 수 없이 빌 게이츠 뜻대로 하였다. 애플은 단돈 1달러에 맥베이식을 마이크로소프트에 넘겼다. 그리고 마이크로소프트는 맥베이식을 땅에 묻었고 애플은 맥베이식의 소스코드와 복사본을 모두 삭제했다. 규모로는 애플이 마이크로소프트보다 훨씬 컸음에도 불구하고 빌 게이츠는 애플에게 마이크로소프트는 없어서 안 되는 존재라는 점을 노골적으로 이용할 줄 알았다. 

하지만 애플에게도 기회는 분명 있었다. 빌 게이츠는 매킨토시의 운영체제가 좀 더 강력한 표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85년 스티브 잡스가 쫓겨난 후 회사의 실권을 쥐게 된 애플의 CEO 존 스컬리(John Sculley)에게 직접 역사적인 메모를 남긴다. 매킨토시가 표준이 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판매량이 필요하다면서 이를 위한 전략까지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믿을 만한 컴퓨터 제조업체 리스트를 손수 적어주며 이들 회사에게 운영체제를 공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당시 빌 게이츠의 메모를 보면 그가 얼마나 뛰어난 통찰력과 직관력의 소유자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매킨토시의 문제와 해결책을 명쾌하게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 메모를 받은 존 스컬리는 빌 게이츠의 메모를 무시했다. 만약 존 스컬리가 빌 게이츠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컴퓨터 업계의 판도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이때 애플에게 보낸 전략을 이용해 세계 IT 업계 제왕으로 등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술적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존 스컬리는 빌 게이츠에게는 정말 편한 상대였다. 빌 게이츠는 존 스컬리를 완전히 유린하며 IBM과의 운영체제 공급 계약에 맞먹는 새로운 계약을 체결한다.

윈도우를 개발 소식에 스티브 잡스가 격노할 때만 해도 윈도우는 아직 출시 전이었다. 그래서 항의를 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윈도우가 출시되자 법에 호소할 수 있었다. 1985년 11월 25일 윈도우가 처음 출시되었고 애플은 이에 분노한다. 그런데 이를 항의하러 간 존 스컬리는 빌 게이츠와 비밀리에 만나서 돌연 세 장짜리 계약을 맺는다. 계약의 핵심은 두 가지였다. 첫째,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용 엑셀의 출시를 2년간 연기한다. 둘째, 마이크로소프트에게 맥 OS의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영구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준다. IBM이 빌 게이츠와 맺었던 운영체제 계약이 얼마나 최악의 선택이었는지를 처음에는 몰랐듯이 계약 당시만 해도 스컬리는 자신이 얼마나 바보스런 행동을 했는지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그저 마이크로소프트의 제품이 매킨토시로 먼저 출시되고 계속 업그레이드된다는 사실에 만족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 계약으로 인해서 애플은 오직 자신들만이 가진 마법을 스스로 빌 게이츠에게 무료로 양도해 버린 꼴이 되었다. 존 스컬리는 자신의 계약이 윈도우1.0에만 해당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후 출시된 윈도우2.0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매킨토시를 베끼자 비로소 그것을 깨닫고 애플은 마이크로소프트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한다. 하지만 빌 게이츠가 누구던가? 자신의 입장에서는 사상 최고의 조건으로 계약을 성사시키지만 정작 상대는 자신이 얼마나 우매한 행동을 하는지조차 전혀 인식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협상의 달인이었다. 그리고 MITS와의 분쟁에서 봤듯 법 앞에서 더욱 위력을 발휘한다. 결국 애플은 1985년에 맺어진 라이선스 계약 때문에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판결을 받았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이제 겁날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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