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즐겁게 하고 싶다는 소망 하나로 게임기획자가 되지만 막상 게임 기획자가 되고 나면 여러 가지 난관들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출근 첫날부터 봉착하게 되는 딜레마는 회사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업무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문제는 초보 게임 기획자에게만 해당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게임 기획자에게 공통되는 난관이기도 하다. 다만 초보 게임 기획자와 다르게 경력 게임 기획자는 게임 기획이 일정한 시스템에 의해서 업무가 나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차이다. 사실 게임기획자는 그 뜻 자체가 두리뭉실한 만큼 그 역할과 포지션 또한 게임 개발팀 내에서 가장 애매모호한 존재이다. 무슨 일인가를 도모하고 추진하고 계획..
슈퍼마리오와 젤다의 전설을 개발하여 게임의 신으로 불리우는 미야모토 시게루는 1952년 교토 외곽의 조용한 농촌마을인 소노베에서 태어난다. 어린 시절 그는 틈만 나면 밖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다. 논에서는 야구를 하고 시냇가에서는 물고기를 잡았다. 숲에서는 친구들과 탐정놀이를 하면서 즐거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소노베는 시내와 멀리 떨어진 전원마을인 관계로 주변에는 문화시설이 없었다. 그리고 미야모토 시게루의 집에는 텔레비전도 없었다. 그래서 그가 문화생활을 즐기는 때는 한달에 한번 기차를 타고 교토를 방문할 때였다. 그는 교토에 가면 극장에서 백설공주나 피터팬 같은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을 관람하기 좋아했다. 그가 조금 더 성장해서 마침내 집에 텔레비전이 생겼을 때는 NHK에서 방송하는 인형극에 빠지기도 ..
“우리는 “예술가”가 아니라 “창작자(Creator)”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더 새롭고 더 재미있는 게임을 창작해 내는 것입니다. 예술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죠. 혹자는 게임을 디지털 오락을 내용으로 하는 예술의 한 형태라고 하지만 저는 게임은 가지고 놀기 위한 장난감이라고 합니다. “ 노무라 테츠야 (전 파이널 판타지 디렉터) 위에 테츠라 노부야의 말이 거슬리는가? 분명히 앞에서는 종합 예술 작가라면서 이제는 예술가가 아니라고 하니 이율배반적이라는 강한 의문이 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테츠라 노부야가 바라보는 예술에 대한 가치관이 조금 틀릴 뿐이다. 드래곤 퀘스트의 게임 기획자인 호리에 유이지는 게임에서 오직 재미만을 추구한다고 한다. 그리고 파이널 판타지의 게임 기획자인 사카구치는 재미에다가 ..
인텔의 창업공신 앤디그로브(2) 실리콘밸리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인텔 인텔이 실리콘 밸리에 끼친 영향은 가히 절대적이다. 실리콘 밸리라는 어원자체가 8인의 배신자들을 취재하면서 돈 회플러(Don Hoefler)가 만든 말이다. 물론 8인의 배신자중에서 리더는 인텔의 창업자 로버트 노이스였고 그 덕분에 로버트 노이스는 실리콘 밸리의 시장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로버트 노이스는 현재 인텔의 최대 라이벌 업체인 AMD에게도 큰 도움을 줬다. 원래 페어차일드 반도체에서 근무했던 제리 샌더스와 그의 동료들은 회사를 그만두고 AMD를 창업하려했지만 아무런 투자자도 모집하지 못해서 그 꿈을 접으려 했다. 이때 소식을 들은 로버트 노이스는 페어차일드시절의 정을 생각해서 조금의 돈을 투자했다. 반도체 업계의 슈퍼스타 로..
“작가의 자질은 타고나는 것이다. 그러나 특별한 자질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적어도 조금씩은 문필가나 소설가의 재능을 갖고 있으며, 그 재능은 더욱 갈고 닦아 얼마든지 발전시킬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 스티븐 호킹 – 유혹하는 글쓰기 중에서 게임 기획자는 작가 정신을 가져야 한다. 자신이 작가라는 생각을 갖는 것이 게임 기획자에게는 매우 중요하므로 절대로 컴퓨터라는 매체에 자신을 가두어서는 안 된다. 컴퓨터 게임 기획자라는 생각으로 창작의 틀을 디스플레이 화면에 한정시키지 말고 세상을 더욱 넓게 보아야 한다. 컴퓨터 게임은 종합 미디어이고 컴퓨터는 미디어의 단순한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현재 우리는 ‘컴퓨터’라는 미디어에 한정시켜 생각하고 있지만 앞으로 세상은 더욱 변화할 것이..
재일교포로 우리에게 친숙한 손정의 역시 부모의 애정과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손정의는 재일교포 3세로 그의 할아버지 손종경은 일본에서 탄광노동자로 일하였다. 강원도가 고향인 손정의 할머니 이원조는 그녀 나이 14세에 일본어도 제대로 할줄 모르는 상태에서 당시 37세였던 손종경과 결혼을 한다. 부부는 일곱명의 자식을 낳는데 손정의 아버지 손삼헌은 장남으로 태어난다. 집안 사정상 손삼헌은 중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생업전선에 뛰어들어서 일을 해야만 했다. 손정의가 태어나자 손삼헌은 정의롭게 살라는 의미에서 이름을 손정의로 지었다. 손정의가 태어났을 때도 돼지를 길러서 생계를 유지해야할 정도로 집안은 어려웠다. 손정의는 80 가구 정도가 무리 지어서 사는 무허가 판자촌에서 어렵게 살았다. 재일교포..
어느날 갑자기 검색어 통계에 총검색어수가 0을 기록합니다. 그래서 유입 경로를 살펴보았더니 유입경로가 오직 구글을 통할뿐 다음으로부터는 아예 0입니다. 다음에서 저의 글이 아예 검색이 안되더군요. 그래서 문의를 했는데 6일째 아무런 응답이 없네요. 뭐 언젠가는 정상화 되리라고 생각하지만 뭔가 답답함을 금할수없네요. 제가 글을 쓰는날 블로그 방문자수는 1200명에서 1500명 내외이고 글을 쓰지 않으면 500명에서 800명사이입니다. 사실 요즘 블로그 활동을 활발히 하는 편도 아니라서 그렇게 방문자수에 그리 연연해 하지도 않고 다음에서 검색이 된다고 해서 더 많은 방문자수가 크게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다음뷰가 이번에 축소개편되는 모습을 보면서.. 다음이 블로거들에 냉대한다는 기분이 들었..
스티브 잡스는 대학원생으로 동거하던 압둘파타 잔달리와 조앤 시블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당시 대학생에 미혼모였던 조앤은 혼자서 아이를 키울 자신이 없어 폴과 클라라 잡스 부부에게 잡스를 입양시킨다. 그녀는 비록 입양을 보내면서도 아이의 대학교까지는 책임져줘야 한다는 조건으로 잡스 부부에게 아이를 맡긴다. 폴 잡스는 고등학교를 중퇴하여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용사였다. 종전 후에는 미국으로 돌아와 기계를 만들거나 고치는 일을 했다. 클라라와 결혼한 그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였지만 10년간 아이가 없자 입양을 결정한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어린 시절부터 사건 사고를 일으키는 말썽쟁이였지만, 스티브 잡스를 첫 번째 자식으로 맞이한 그들은 친자식 그 이상으로 스티브 잡스에게 애정을 듬뿍 담아 키웠다. 그래서..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Joseph Campbell은 세계 각지에서 전해지는 각종 민담과 전설들을 조사한 후,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모습에 일정한 패턴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패턴을 분석한 연구 결 과는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라는 책으로 발표되어 큰 반향을 일 으켰다. 특히 영화계에 큰 영향을 주어 조지 루카스George Lucas는 이 책을 참고하여 의 시나리오를 작성할 정도였다. 천의 얼 굴을 가진 영웅은 할리우드에서는 일종의 교과서가 되어 영화 제작 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필자는 수년간 IT와 관련된 글들을 써오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그것은 전설 속 영웅담이 공통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듯이 IT 슈퍼리치의 성공담에도 공통된 패턴이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공통 된 ..
IT 업계 최고의 갑부인 빌 게이츠의 경우는 그의 모든 것이 부모님이 만든 하나의 작품이라고 말하는 게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부모의 치밀한 관심과 교육에 의해서 자라났다. 빌 게이츠의 아버지는 시애틀에서 성공한 변호사였고 어머니는 교직에 있다가 각종 봉사활동을 하였다 이런 부모님 밑에 자란 빌 게이츠의 삶 곳곳에는 부모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빌 게이츠는 시애틀 지역에서 손꼽히는 명문가 집안에서 1955년 10월 28일 태어난다. 아버지인 인 윌리엄 헨리 게이츠2세는 유명 변호사였고 어머니인 메리 게이츠는 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 나중에는 자선사업에 전념하게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차후에 빌 게이츠가 사업을 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사업을 시작하면서 마이크로소프트는 여러 법적인 문제를..
게임이 스티브 워즈니악의 컴퓨터 혁명을 이끌다. 여러 IT 슈퍼리치들과 게임의 인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였는데 게임과 관련되어서 가장 첫 번째로 언급되어야 할 인물은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이다. 그들은 게임에 대한 열정과 인연덕분에 개인용 컴퓨터의 혁명을 불러일으키는 행운까지 거머쥐게 된다. 1974년 리드대학교를 중퇴한 스티브 잡스는 놀면서 일을 할 수 있다는 게임 회사 아타리의 구인광고를 보고는 그날 아타리를 찾아간다. 무작정 일자리를 달라고 생떼를 부리자 한 직원은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고민을 하였지만 직장 상사는 스티브 잡스의 열정을 높이사서 채용을 하게 된다. 결국 스티브 잡스의 첫 번째 직업은 게임기획자가 되는 것이다. 아타리는 오락실용 게임인 퐁으로 큰 수익을 얻고 있는 ..
소송은 기업의 흥망성쇠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현재 파산 절차중인 코닥의 몰락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 하나가 바로 폴라로이드와의 소송이었다. 즉석 카메라와 관련된 특허를 침해당했다며 폴라로이드가 코닥을 상대로 소송이 제기하면서 시작된 이 전쟁은 무려 15년간의 질긴 싸움끝에 폴라로이드가 승소를 한다. 코닥은 8억 7300만 달러를 손해배상액으로 지급해야 했고 기타 비용으로 10억 달러 이상의 손해를 봐야 했다. 하지만 두 회사는 이 소송으로 너무 많은 힘을 쏟아부었고 결국 회사의 경쟁력까지 갉아먹으며 두회사 모두 파산 하는 계기가 되었다. IT 기업에서도 법에 의해서 기업이 공중분해가 되거나 과거의 화려했던 위용을 잃었던 사례가 많다. 과거 IT 분야에서 최고에 오른 기업들이 가장 두려워..
저는 처음부터 레인보우의 팬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마하라는 노래를 듣게 되었고 노래의 사운드와 완성도를 통해서 이것은 "명곡"이다라고 확신을 하고 관련 글들을 찾아 보게되었습니다. 저는 올초에 이 노래를 알게 되었으니깐 활동이 끝나도 한참 전에 끝난 노래를 알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제가 이 노래의 존재자체를 몰랐으니 홍보 역시 별로 였다는건 너무나 자명해보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레인보우라는 그룹에다가 김재경과 고우리라는 멤버를 알고 있으며 그들의 전작인 A라는 노래도 알고 있으니 나름대로 최신 가요를 잘 알고 있던 사람이니깐요.^^;;(하지만 요즘 나오는 아이돌은 너무 많이 나와서 알수가 없더군요. ) 그리고 저는 마하가 스윗튠의 노래라는것까지 예측을 했는데 정확히 맞아 떨어졌습니다. 이렇게 ..
가을만 되면 정말 미치도록 빠져드는 음악입니다. 노래제목은 모든 인류의 평화를 위해라는 거창한 제목이지만.. 평화를 위해 제발 나를 떠나달라는 그런 노래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에는 재미난 사연이 있습니다. 그 사연인즉 사실은 이노래가 이정봉이 부른 "어떤가요?"라는 노래와 완전히 얽혀있다는겁니다. 솔직히 이 노래만 듣고서 이정보의 어떤까요를 떠오르는 분은 없을 겁니다. 그러고보니 어떤가요?라는 노래 역시 가을에 딱 맞는 노래이기는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 노래가 명곡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노래가 사실은 표절 시비에 걸리면서 인기가 추락했습니다. 당시 일본노래를 베꼈다고 난리였죠. 일본 그룹인 Dream Come True의 Love Love Love를 표절했다는건데.. 아래 노래와 한번 비교해보세요. 마..
스티브 잡스는 애플과 픽사의 CEO로써 참으로 놀라운 일들을 해냈다. 차고에서 시작된 애플은 단 4년 만에 급성장했고, 포드 자동차 이후 가장 성공한 주식공개 사례로 꼽힌다. 당시 25세였던 스티브 잡스는 보유한 주식 가치가 2억 달러를 넘어서면서 젊은 갑부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 후 자신이 창업한 회사에서 쫓겨나는 비극을 겪기는 했지만 픽사를 창업한 후 1995년 주식 시장에 상장시킨다. 이때 스티브 잡스가 보유한 주식 가치는 11억 달러가 넘는다. 두 회사를 직접 창업하고 운영하면서 뛰어난 경영 능력을 드러낸 것이다. 특히 도산 위기에 있던 애플을 기적처럼 살려 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 IT 기업 중 시가총액 1위에 올려놓음으로써, 역시 스티브 잡스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의 나이 고작 34세였던..
윌 라이트는 명예의 전당에 오른 게임 크리에이터 중에서 가장 열정적인 사랑을 한 사람일 것이다. 그의 부인인 조엘 존스는 윌라이트보다 무려 12살이나 많다. 조엘 존스는 창문이 깨지는 사고로 몸에 상처를 입고 고향으로 잠시 요양을 오게 된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그도 마침 방학을 맞이하여 고향에 돌아온다. 그가 어린 시절의 친구 집에 잠시 방문하게 되는데 이때 마침 친구의 큰 누나인 조엘 존스를 보게 된다. 그와 조엘 존스는 나이에 상관없이 서로에게 빠져들었고 열정적으로 사랑하기 시작한다. 이때 조엘 존스가 다시 몸이 완쾌되자 원래 자신의 직장이 있는 캘리포니아로 돌아가게 된다. 그는 자신의 사랑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결국 다니고 있던 대학을 포기하고 조엘 존스를 따라서 캘리포니아로 가게 된다. 완전히 ..
역시 심시티라는 타이틀은 그 이름만으로도 팔리는 맥시스의 최고 상품이었고 회사를 위기에서 구해주었다. 심시티 2000 이후에 맥시스의 투자자들은 회사를 공개해서 주식을 공모하자고 한다. 윌 라이트는 회사공개를 원하지 않았지만 처음 투자를 받을 때의 조건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만다. 1995년에 맥시스는 기업을 공개하고 3800만 달러의 기업가치를 인정받는다. 이제 맥시스는 직원 수 300명의 중견기업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었다. 불과 6년 전에 제프 브라운의 아파트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작업에 몰두했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놀라운 변화였다. 하지만 맥시스가 주식 시장에 상장하면서 회사는 점차 하락세로 돌아선다. 회사의 분위기에서 활기가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투자자들의 간섭..
완성된 게임을 보자 브로더 번드는 이번엔 의외로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완벽한 확신은 아니었다. 브로더 번드가 유통을 담당하되 포장비용과 같은 제반 경비에 대해서 맥시스가 비용을 부담하는 것이었다. 기분이 나쁠 수 도 있는 이런 제안에 대해서 정작 그는 순순히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자신도 게임의 성공을 비관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어찌되었든 유통을 해준다는 브로더 번드가 무조건 감사했을 뿐이다. 게임이 발매하자 마자 그의 예측은 정말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만다. 게임은 순식간에 입 소문이 번지면서 1989년 한해 동안 무려 300만장이나 판매되는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당시로써는 이례적으로 시사잡지인 뉴스위크지에서 심시티를 집중 조명 하면서 기존 상식을 뛰어 넘는 최고의 게임이라고 극찬하였다. 그 ..
윌라이트는 게임이 단순히 놀이가 아닌 그 이상이 되기를 바랬다. 그는 자신이 완성시킨 발겔링만의 습격을 실제로 게임플레이 하는 것보다는 만드는 과정이 훨씬 재미있었던 체험을 곰곰이되씹어 보았다. 발겔링만의 습격을 제작할 때 게임의 배경으로 쓰이는 사물들을 마음 데로 배치하거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프로그램의 일종인 맵 에디터를 가지고 스테이지를 디자인 했던 기억을 통해서 그는 새로운 결론을 내린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만드는 창조의 순간이야 말로 참된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그날 이후 게임 플레이어가 게임속에서 직접 뭔가를 만들면서 창조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게임을 개발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는 새로운 게임 개발을 위해서 수많은 책을 읽었다. 그리고 도시역학과 시스템 역학의..
윌 라이트는 1960년 7월 20일 미국의 대표적인 남부도시인 애틀란타 조지아에서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 윌리암 라이트는 화학자이며 동시에 라이트 플라스틱사의 사장이었다. 하지만 윌 라이트가 아홉 살이 되던 해에 사망하고 만다. 그의 어머니 베버리 에드워즈는 자식들의 양육을 위해서 그녀의 고향으로 이사를 간다. 이때부터 그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한다. 친구들에게는 괴짜 혹은 기인으로 불릴 정도로 그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습득하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책 읽기에 몰두하기도 했던 그는 이때 배운 것들이 지금도 자신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또 다른 취미는 프라모델 만들기였다. 각종 로보트와 배 같은 것을 만들어서 자신의 방안에 장식하는 것을 즐겼다. 또한 이러한 취미가..
게임은 소프트웨어 장난감이지요. 윌 라이트는 게임의 차원을 높인 인물이다. 그가 게임계에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게임이라는 것은 적과 경쟁하거나 싸워서 승리하는 게임이었다. 성공과 실패가 명확한 만큼 게임 플레이어가 하는 것도 일방적으로 정해져 있었다. 정해진 일을 얼마나 능숙하게 해내느냐가 결국 승패의 조건이었다. 물론 롤플레잉 게임처럼 머리를 사용하는 지능형 게임이 있기는 했었다. 하지만 롤플레잉 게임은 악에 물들어진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주인공이 악의 무리들과 싸워서 승리해야 한다는 엔딩 조건이 있었다. 게임유저는 게임 기획자가 의도한 데로 일정한 룰을 따라서 플레이 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선입관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것이다. 애초에 그의 게임에는 승리 조건이 없었다. 그러므로 역시 엔딩 ..
한국 최고의 천재 게임 크리에이터를 뽑으라고 하면 단연 송재경 XL 게임즈사장일 것이다. 송재경 사장이 게임을 하나 만들 때 마다 한국의 게임 산업은 한 단계씩 발전하는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는 이를 직접 체험해왔다. 송재경 사장이 게임을 하나 히트할 때마다 나의 월급은 두 배씩 올랐던 것이다. 송재경 사장이 게임시장의 파이를 키웠기 때문이다. 또한 동아리 수준에 머물렀던 한국 게임 개발사들을 세계의 유명 회사와 경쟁하게 만든 것은 송재경씨의 뛰어난 게임들 덕분이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송재경씨의 영향력을 확인 할 수 있는 사건이 2005년 10월에 일어났다. 네오위즈에서 송재경 사장의 게임을 퍼블리싱 한다는 계약 소식이 전해지자 다음날 네오위즈의 주가는 상한가를 쳤다. 게임을 잘 모르는 사..
팀 스위니와 존 카멕은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천재 게임 프로그래머이자 업계가 주목하는 라이벌이다. 이 둘은 모두 직접회사를 창업해서 세계 최고의 3D 게임 엔진을 거의 혼자 힘으로 완성했으며 회사의 오너이지만 개발현장에서 직접 프로그래밍을 하는 점들이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또한 둘 다 미야모토 시게루를 존경하고 있으며 그들이 개발한 코맨더 킨과 재즈 잭래빗은 횡 스크롤 액션게임으로 슈퍼 마리오와 아주 많이 닮아있다. 2D게임으로 시작했지만 이내 곧 세계최고의 엔진을 개발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는 것이 너무나 아이러니 하다. 3D 엔진의 시작은 존 카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덕분에 명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당연히 존 카멕이 앞서 있었다. 하지만 최근 3D 엔진 시장에서는 언리얼(Unreal)이 확실히 우위..
울펜 슈타인 3D의 성공 이후에도 존 카멕의 열정에는 휴식이 없었다. 그는 더욱 강력한 기술로 전세계 게임팬들에게 충격을 선사하니 그것이 바로 둠이었다. 둠의 성공으로 Id 소프트웨어는 최고의 게임 개발사로 인정을 받았으며 존 카멕 자신은 세계 최고의 스포츠카인 페라리 자동차를 구입할 정도로 큰 부자가 되었다. 둠은 영화 에일리언과 이블데드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리고 둠이라는 제목은 컬러 어브 머니에서 톰 크루즈가 하는 대사를 듣고서 그 어감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선택했다. 둠이라는 게임은 오직 존 카멕의 기술로 이루어진 게임이다. 게임 개발 자체가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존 카멕의 프로그래밍 기술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면서고 시작된 게임이다. 존 카멕이 네트워크를 이용해..
처음 Id 소프트웨어를 창업한 그들은 안정적인 수익을 거두기 위해서 당시 인기 게임이었던 코맨더 킨 시리즈를 6탄까지 만들었다. 한편 존 카멕은 오래 전부터 3D 그래픽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감이 부족한 2D액션게임으로는 분명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고 뭔가 변화를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고안한 것은 3D기술을 게임에 구현하자는 것이었다. 리더인 존 로메오도 그의 생각에 동의하였고 2D 액션게임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기 위한 게임을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자고 하였다. 그것이 바로 1991년도에 발매된 호버탱크 원(Hover Tank One)과 카타콤3D(Catacomb 3D)였다. 코맨더 킨에서부터 파트너 관계를 맺고 유통을 책임졌던 APOGEE사의 CEO인 스캇 밀..
모든 회사의 취업제의를 한결 같이 거절하던 존 카멕이었지만 운명적으로 존 로메오를 만나며 그의 생각을 바꾸게 된다. 존 로메오는 이미 컴퓨터 게임계에서 뛰어난 실력으로 인정받는 프로그래머였다. 존 카멕은 처음으로 자신이 뭔가를 배울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자 존 로메오가 같이 일하자는 제의를 선뜻 받아들인다. 당시 존 로메오는 소프트디스크(SOFTDISK)라는 회사에서 일했다. 소프트 디스크는 매달 발행되는 잡지와 함께 번들로 각종 프로그램과 게임을 제공하는 회사였다. 존 로메오는 여기서 게임 개발을 총책임지는 사람이었다. 같이 일을 하게 된 존 카멕과 존 로메오는 호흡이 척척 맞았고 많은 게임 프로그램들을 빠른 시간 안에 개발을 하여서 소프트 디스크에 큰 수익을 거두게 해주었다. 이들은 회사 내에..
1970년 생인 존 카맥은 어렸을 때부터 천재성을 가지고 있는 소년이었다. 비록 남들보다 말을 늦게 시작하였지만 그는 초등학교를 입학하면서부터 뛰어난 학습능력을 선보였다. 학교시험에서 만점을 받는 것은 기본이었고 이미 중학교 1학년 때 중학교 3학년의 모든 과목들을 이해하고 있었다. 또한 이미 자신만의 언어체계를 개발해서 독특한 기호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자신이 남들보다 훨씬 똑똑한 존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아이들과 노는 것에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자신이 머리 속에서 생각하는 것과 친구들이 관심 있어 하는 것에는 이미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운명은 12살 때 이미 결정이 났다. 처음 애플 컴퓨터2를 보는 순간 그는 자신의 인생을 결정..
한가지 일에 열심히 일하는 것은 성공을 위한 가장 실질적인 방법이다. 오직 목표에만 초점을 맞춰라. 그리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다음 발걸음을 내딛더라. 만약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길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다른 길도 함께 가보고 더 나은 것이 어떤 것인지 찾아내라 존 카멕은 그야말로 천재라는 말 이외에는 표현 할 수 없는 역사상 최고의 슈퍼 게임 프로그래머이다. 그는 게임계에 FPS(First Person Shooter:1인칭 액션 슈팅게임)라는 게임 장르를 창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앞선 3D 기술로 전체 게임 프로그래밍계에 일대 혁명을 불러 일으켰다. 그가 처음 세상을 놀라게 한 작품은 코맨더 킨(Commander Keen)이였다. 런 앤 액션 게임방식으로 한때 슈퍼 마리오3의 카피게임이라는 비..
파이널 환타지의 최고 라이벌 게임은 단연 드래곤 퀘스트이다. 사실 파이널 환타지는 드래곤 퀘스트의 성공에 편승해서 2등이라도 되자는 심정으로 만든 게임이다. 하지만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게임이 진화하면서 라이벌 관계가 형성되었다. 드래곤 퀘스트를 만든 게임 크리에이터가 바로 호리이 유이지이다. 게임만큼이나 호리이 유이지와 사카구치는 많은 부분에서 비교의 대상이다. 실제 둘은 작업스타일이나 게임관에 있어서 많은 부분이 다르다. 작업스타일에 있어서 사카구치는 365일 내내 일중독자처럼 일에 몰두하는 스타일이라면 호리이 유이지는 일 외의 것을 많이 즐기며 일하는 중에도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또한 사카구치는 게임의 재미에 감동을 주기 위해서 그래픽의 비주얼이나 사운드에 많이 신경을 쓴다면 호리이 유이지는 ..
사카구치가 말하는 게임 미스트 워커의 로고는 사카구치가 그의 딸과 같이 만든 것이다. 20번이나 퇴짜를 놓으면서 딸을 괴롭혔다고 웃는 그를 보면 그와 가족들의 관계를 쉽게 예상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게임에 재미뿐만 아니라 감동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노력하는 크리에이터다. 그의 목표는 게임으로 소설이나 영화가 줄 수 없는 감동의 눈물을 선사하는 것이다. 영화는 실패했지만 그는 영화제작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특히 그가 절실히 깨달은 것은 게임 제작이 본격화 되기 전의 프리 프로덕션단계의 중요함이다. 프리 프로덕션에서 가능한 많은 것을 실험해 본 다음에 본격제작에 들어가야 그만큼 시행착오가 줄어들 것 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는 게임 크리에이터에게 시간관리가 중요하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