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퀘어를 그만 두게 된 사카구치는 일본에서 다시 하와이로 돌아가서 두문불출하며 종적을 감춘다. 스퀘어와의 결별은 그에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는 모든 것을 그냥 잊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게임과 관련된 일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인생을 즐기면서 그는 최대한의 휴식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세상은 살만한 곳이고 멋진 곳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여유로운 삶을 살아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안하고 1년 6개월의 세월이 흐르던 어느 날 하와의 바다를 산책하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이 40이 넘어서 어린 아이처럼 우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맘껏 눈물을 흘렸다. 그 동안 꾹꾹 참고 참았던 괴롭고 힘..
파이널 환타지의 성공 이후 스퀘어는 일본 최고의 게임 업체가 되어 있었다. 실속은 에닉스였지만 외형적인 측면에서는 스퀘어가 최고였다. 에닉스는 오직 드래곤 퀘스트 게임하나에 매진하고 있는 동안 스퀘어는 다양한 게임들을 동시다발적으로 개발하였다. 로맨싱 사가, 크리노 트리거, 성검 전설등 많은 프렌차이즈 게임들을 보유하게 되면서 회사의 자금도 탄탄하여 졌다. 그리고 이러한 안정과 성공은 사카구치가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계기가 된다. 원래 스토리가 있는 게임에서 강점을 보였던 그는 이제 100% 스토리로만 이루어진 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바로 그때 그가 애플컴퓨터와 드래곤 퀘스트를 처음 보았을 때의 충격을 다시 한번 겪게 되니 그것이 바로 토이 스토리이다. 100% 컴퓨터 그래픽 에니메이션인 토..
드래곤 퀘스트의 놀라운 성공의 뒷 배경에는 사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드래곤 퀘스트는 발매 4개월 전부터 기대되는 게임 1위였다. 드래곤 퀘스트를 개발중인 에닉스는 무명의 회사였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었을까? 그것은 일본 최고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만화잡지인 소년점프에서 밀어주는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드래곤 퀘스트의 아버지 호리이 유이지는 소년점프에서 원고를 기고하는 사람이었다. 그 덕분에 소년점프 편집부 사람들과는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마침 소년점프에서는 게임 관련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인기를 얻자 호리이 유이지에게 지금 만들고 있는 드래곤 퀘스트의 게임 제작 과정을 원고로 써달라고 부탁한다. 그래서 호리이 유이지는 자신이 참여하고 있는 드래곤 퀘스트의 게임 제작과 관련해서 일어나는..
계속 되는 게임의 실패! PC 방의 주인인 미야모토 마사시는 스퀘어의 창립자이고 현재 스퀘어 에닉스의 최대 주주로 유명하다. 미야모토 마사시는 다른 사람 보다 먼저 컴퓨터의 가능성을 알아 채고 소프트웨어 사업에 진출하게 된다. 하지만 인적 네트워크가 부족했던 그는 개발자들을 유인하기 위해서 PC방 사업을 계획한다. 당시까지 만해도 애플의 컴퓨터 가격은 80만엔(우리 돈 800만원)이 넘을 정도로 초고가였다. 그래서 컴퓨터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은 소수였고 PC방까지 찾아오는 사람은 개발자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실력을 갖춘 프로그래머였다. 이런 현실을 깨달은 미야모토 마사시는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이라는 뜻을 가진 스퀘어를 PC방으로 창업해서 개발자들을 모을 생각이었다. 미야모토 마사시는 애초에 P..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1962년 11월 25일 이바라키현에서 태어난다. 그가 처음 접한 게임은 12살 때 백화점 옥상에서 했던 퐁이다. 그리고 그는 동생과 함께 닌텐도의 게임&워치나 장난감 광선총을 가지고 즐겁게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게임은 그에게 하나의 놀이에 지나지 않았고 자신이 게임을 개발할 것이라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직접 스쿨 밴드를 조직해서 많은 곳에 공연을 다닐 정도로 음악에 자신을 불살랐다. 음악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생각으로 음악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스쿨밴드에서 그는 작사와 작곡에 보컬 그리고 일렉트로닉 기타까지 맡은 만능 멀티 플레이어로 팀의 리더였다. 그는 일본 공중파 방송사가 주관하는 순수 창작 음악 경영대회에 참가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그..
새로운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아무도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는 미지의 초원을 걸어가는 느낌이다. 파이널 환타지의 아버지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일본식 롤플레잉 게임을 전세계에 알린 명장 게임 크리에이터이다. 파이널 환타지가 처음 등장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드래곤 퀘스트의 인기에 영합한 아류 작이라면서 비난을 하였다. 하지만 실제 게임을 플레이 한 사람들의 입 소문을 타기 시작하면서 최고의 롤플레잉 게임 시리즈로 거듭나게 된다. 파이널 환타지는 드래곤 퀘스트와 여러 가지 점에서 비교가 된다. 드래곤 퀘스트는 기존의 캐릭터와 게임시스템을 계속해서 유지하면서 정통성을 내세우는데 비해서 파이널 환타지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드래곤 퀘스트에서의 세계관과 캐릭터가 정해져 있지만 파이널 환타지는 세계관과 캐릭터자체가 계속해..
스즈키 유는 세계 최고의 기술을 가진 AM연구소의 책임자가 되어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였다. 한국에서 최고의 게임 기술을 가진 개발팀은 엔씨 소프트의 E&G 팀이다. 그리고 이 팀의 총책임자가 바로 배재현 상무이이다. 언리얼 엔진의 힘을 빌렸다고는 하지만 리니지 2의 기술 역시 당시로써는 세계최고의 수준이었다. 한국에서도 이런 게임을 만들 수 있구나 생각하면서 게임의 그래픽에 감탄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배재현 상무는 과거 하이텔 게임기 동호회에서 세가관련 소식을 가장 먼저 알렸던 게임마니아였다. 그러던 중에 병역특례로 일하던 현대 전자 연구소에서 현재의 NC 소프트 사장인 김택진씨를 만나며 본격적으로 컴퓨터 게임개발에 뛰어든다. 배재현 상무는 리니지의 핵심 개발자 다섯명(송재경 김민수, 김형진, ..
세계 3대 격투 게임은 드림캐스트의 버추어 파이터와 플레이 스테이션의 철권 그리고 XBOX의 데드 오어 얼라이브를 일컫는 말이었다. 사실 데드 오어 얼라이브는 스즈키 유가 이끌었던 AM2연구소의 기술적인 도움과 자문이 없었다면 탄생하기 힘든 작품이었다. 세가의 가정용 게임기인 새턴에 게임을 발매한다는 조건으로 세가에서 여러모로 큰 도움을 주었다. 이때 이타가키는 스즈키 유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타가키가 가장 좋아하는 게임이 버추어 레이싱이고 데드어오 얼라이브는 버추어 파이터를 보고서 만든 작품이라고 할 정도로 이미 그전부터 스즈키 유의 추종자였다. 게임 제작이 난관에 부딪힐 때면 직접 스즈키 유에게 찾아가서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이타카키는 스즈키 유처럼 프로그래머 출신이었고 실제 데드 오어 얼라이브..
스즈키유는 게임 크리에이터 중에서 가장 다재 다능한 사람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으로 미술 전시회를 열 정도로 수준급의 그림실력을 보여준다. 이미 AM2연구소에서부터 프로그래밍 실력은 최고로 인정 받았다. 그는 자동차와 오토바이로 속도를 즐기는 스피드 광이기도 하다. 세가에서 페라리라는 말이 나오면 스즈키 유를 연상할 정도로 동급의 이미지로 취급 받을 정도이다. 모터 스포츠외에 그가 즐기는 취미는 와인과 당구이다. 이미 당구는 쉔무에서 게임으로 구현했고 그는 이제 자신이 좋아하는 와인을 게임에 어떻게 접목할 것인가 고민을 하고 있다고 농담 삼아 말한다. 그는 행복한 가정을 가꾼 훌륭한 가장 중에 하나다. 그는 집에서 아이들과 하는 게임이 가장 재미있기 때문에 직장에서 일로써 게임..
스즈키 유의 AM2 연구소는 가정용 게임이 아니라 오락실의 아케이드 게임을 전문으로 하는 곳이었다. 세계최고의 기술력으로 세계최고의 게임을 개발한다는 그들의 좌우명 되로 AM2 연구소는 버추어 파이터 이후 최고의 기술력을 가진 최고의 게임 개발팀으로 공인 받게 된다. 세가가 AM 연구소의 이러한 명성을 그냥 놔둘 리가 없었다. 가정용 게임기 시장에서 부진했던 세가의 경영진은 AM2연구소에 가정용 게임기인 드림캐스트 전용으로 게임을 개발하도록 지시를 내린다. AM2 연구소는 이로써 첫 번째 가정용 콘솔 게임 전용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된다. 사실 이것 때문에 AM2 연구소에서는 여러 가지 논쟁을 벌여야 했다. AM2 연구소가 콘솔 전용 게임을 개발하게 된다는 것은 하드웨어의 제약 없이 무조건 세계 최고 기술..
1980년대 후반만해도 3D 기술은 백만 달러가 넘는 초고속 컴퓨터의 전유물이었다. 그래서 3D 그래픽 기술을 게임에 접목하려는 시도는 감히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세상의 단 한명 스즈키 유는 그 동안의 명성 덕분에 당돌하게도 3D 전용의 하드웨어 머쉰을 게임에 구현할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만든 것이 바로 MODEL 1이다. 스즈키 유는 당시 비행기 조종사들을 대상으로 실제 비행기를 탄 것처럼 가상적인 그래픽환경을 3D로 제공하여 교육 시키는 컴퓨터 기술을 게임에 응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스즈키 유는 전투기나 비행기를 만드는 록히드 마틴사가 그 기술에 최고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들과 접촉했다. 그렇게 해서 록히드 마틴사는 세가의 주문대로 동시 발색수 1600만색에 1초당 18만폴리곤..
스즈키 유는 1958년 6월 10일 이와테 현의 외곽지역인 카마이시에서 태어나서 그곳에서 자랐다. 그는 어린 시절 게임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로 미술과 음악과 같은 예능 분야에 조예가 깊었는데 이 덕분에 그는 공부 이외에도 여러 예능 활동을 하느라고 다른 것을 할 시간이 없었다. 중학교 때부터는 서예와 그림까지 공부하면서 그는 게임 크리에이터가 갖춰야 할 기본능력을 이미 갖추게 되었다. 물론 그는 이때까지의 모든 예능 활동이 게임 개발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는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다. 그는 그때까지 게임이라는 것 자체를 몰랐던 시절이었다. 자신은 그저 아버지처럼 초등학교 교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스즈키 유는 오카와마 공과 대학에 입학해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게 된다. 대학생..
"오늘 실패한다고 해서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실패했다고 해서 내일도 모레도 계속 실패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게임 개발이라는 것은 대부분 실패의 연속입니다. 실패가 거듭되다가 포기하기 직전 성공하는 것이죠. 내일은 내일의 바람이 붑니다. 실패를 두려워하면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스즈키 유는 버추어 파이터 시리즈로 일약 세계적인 게임 크리에이터로 도약했다. 하지만 세계최초의 아케이드 게임인 “행온”을 1985년에 발표하면서 이미 세가 내에서는 최고의 게임 크리에이터로 인정받고 있었다. 행온은 그가 1983년에 세가에 입사해서 단 2년 만에 이루어놓은 성과이기에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행온에서 그는 프로그래밍과 기획을 같이 담당하여 게임의 개발에 절대적인 공헌을 ..
조기용 사장은 비록 피터 몰리뉴처럼 하나의 장르를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한국 최초의 3D MMORPG 게임인 뮤를 개발하여 한국 게임의 성과를 드높인 게임 크리에이터이다. 조기용 부사장은 스즈키 유가 개발한 세가의 3D 격투 액션 게임인 버추어 파이터에 감동하여 게임 개발자가 될 것을 꿈꾸게 된다. 혼자서 독학으로 프로그래밍 공부를 하였고 시험 삼아서 만든 프로그램을 하이텔 게임 제작 동호회에 올려서 개발자들 사이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도 3D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하고 있었을 때에 대학교 1학년생이 독학으로 3D 엔진을 개발했다고 하니 사람들이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이런 능력은 많은 게임회사들의 입 소문을 타고 스카우트의 표적..
피터 몰리뉴는 포퓰러스로 갓 게임을 창시해서 그 장르의 최고가 되었다. 이렇게 하나의 장르를 만들어서 그 장르의 최고가 되는 게임 크리에이터에게 거장이라는 말을 할 수 가 있다. 코지마 히데오 역시 첩보 액션 게임이라는 장르를 만들어서 그 게임의 최고 대가가 되었다. 코지마 히데오는 1963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강제로 보여주는 영화였지만 결국 그는 영화광이 되고야 말았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지만 실패하고 게임회사인 코나미에 입사하게 된다. 펭귄 어드벤쳐라는 게임의 보조를 한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담은 로스트 월드를 기획하지만 시장성을 이유로 취소당한다. 그리고 다음에 기획한 게임이 바로 메탈기어이다. 처음 스파이를 소재로 코지마 히데오가 게임을 기획했을 때만 해도 회사 내부에서는 그를 비웃..
피터 몰리뉴는 영국과 유럽을 대표하는 기획자이니만큼 그는 단순히 자기의 게임회사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항상 유럽에서 게임 산업이 어떻게 해야 발전할 것인지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한다. 300여 개 였던 게임 개발사가 수십 개에 불과해진 현재의 유럽의 상황에 대해서 그는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회사가 자금을 투자 받는 방식에 대한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그의 이런 노력을 알기 때문에 영국왕실에서도 그에게 영국 국민에게 최고의 영예인 대영제국훈장(OBE)을 선사한 것이다. 현재 영국 왕실도 게임을 미래 전략 산업으로 보고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영국 왕실의 앤드류 왕자가 한국에 와서 게임업체인 엔씨 소프트와 웹젠을 방문한 것도 이런 전략의 일환이다. 토니 블레어 수상도 피터 몰리뉴..
EA를 그만 둔 후에 피터 몰리뉴는 무조건적인 휴식을 선언한다 그래서 한때 사람들은 그가 게임계에서 은퇴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돈도 많이 있으니 일주일에 100시간씩 일하는 게임 개발자 보다는 뭔가 편한 일을 찾아 볼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약간의 휴식을 하고 바로 게임계로 복귀한다. 그리고 라이언 헤드를 설립한다. 그는 게임 개발사를 차리면서 한가지 결심을 하게 된다. 한 팀에서 20명 이상을 투입시키지 않겠다는 것이다. 가족 같은 분위기를 유지하고 긴밀한 관계 속에서 게임을 개발할 수 있는 개발 인력의 한계를 20명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급박한 상황 속에서는 더 많은 인력을 투입하는 비상 사태가 있을지라도 핵심 인력은 무조건 20명을 상한으로 두는 원칙을 세웠던 것이다. 이러..
피터 몰리뉴는 새로 게임회사를 창업하면서 우선 회사이름을 게임회사와 어울리는 볼프로그(Bullfrog )로 개명하기로 한다. 그는 뭔가 세상을 깜짝 놀랠만한 새로운 장르의 게임을 개발하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의 유년시절을 떠올렸다. 개미들을 괴롭히며 자신이 그들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절대자의 기분과 느낌을 게임에 적용하면 어떨까 하고 고심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컨셉을 확대 발전시켜서 게임 플레이어가 신이 되어서 세상을 다스리면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을 해보았다. 이렇게 해서 신이 인간생활에는 직접 개입하지는 않지만 주변환경이나 날씨등의 변화를 통제하면서 인간이 어떻게 반응할지를 지켜보는 갓 게임(God Game)을 제작하게 된다. 이게임의 원래 제목은 크리에이션(CREATION)이었으나 게임을 유통..
개미 킬러였던 어린 시절 피터 몰리뉴는 1960년 영국 길포드 써레이(Guildford, Surrey)에서 장난감 가게 주인의 아들로 태어난다. 곤충들에 대한 특별한 호기심을 제외하고는 그의 어린 시절은 일반 사람과 틀린 것이 없었다. 그는 다섯 살쯤에 집의 앞마당에서 우연히 개미떼를 발견한 이후에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큰 재미를 느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인가 개미들의 생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우선 막대 사탕과 과자 그리고 설탕들을 모아서 개미들이 모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의 이동경로를 따라서 흙을 팠다. 개미들의 본거지를 찾기 위해서였다. 개미 본거지에서 여왕개미를 보고서 그들의 권력관계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는 왠지 모르게 심술이 난 그는 개미들의 안식처(?)를 일부러 부..
나는 한때 게임이 스노보드와 같이 일시적인 유행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게임은 영화의 최고 경쟁자이다. 와우~! 정말 놀랍지 않은가요? 영국 명예 훈장 수상 소감 중에서 피터 몰리뉴는 리차드 게리엇(울티마 시리즈 개발) 그리고 시드마이어(문명 시리즈 개발)와 함께 세계 3대 게임 개발자로 불린다. 하지만 필자 본인의 생각에 그는 리차드 게리엇이나 시드 마이어보다는 중량감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리차드 게리엇은 아시다시피 울티마라는 게임으로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을 최초로 개발했고 6개월 차이로 최초의 타이틀은 놓쳤지만 울티마 온라인을 통해서 MMORPG 게임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또한 시드 마이어는 게임타이틀에다가 자기이름을 붙인 최초의 게임 크리에이터이다. 시드 마..
리차드 게리엇은 게임 크리에이터 중에서 가장 쇼맨쉽이 강한 사람 중에 하나다. 자신은 브리티니아(게임 울티마에 등장하는 지역)를 다스리는 군주라면서 자기를 로드 브리티시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대단한 쇼맵쉽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게임이라는 가상의 세계뿐만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게임속 캐릭터처럼 살려고 한다. 말투나 복장까지 중세복장을 입고 칼을 휘두르는 제스처로 게임을 홍보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일본의 크리에이터들은 리차드 게리엇처럼 쇼맨쉽이 있는 사람을 찾기는 힘들다. 바이오 하자드의 미카미 신지정도가 바이오 하자드 속의 게임 캐릭터 복장을 하고서 게임 페스티벌을 열려고 했지만 사람들의 참여가 적어서 취소 된 적은 있었다. 그러나 야마우치는 좀 다르다. 게임 쇼의 무대에서 매년 춤을 추는 그는 게임..
리차드 게리엇이 생각하는 게임이란 우리는 세상을 창조한다고 외쳤던 오리진의 모토속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그가 항상 강조하는 세상을 창조 한다는 의미는 톨킨이 반지의 제왕을 쓰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톨킨은 단순히 스토리만 쓴 것이 아니라 환타지라는 세상을 창조하였다. 반지의 제왕 속에서 살아가는 종족들은 모두 그들의 전설과 역사가 있다. 또한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문화와 관습이 들이 있는데 이 모든 것을 톨킨이 창조해내었다. 그 역시 톨킨처럼 울티마를 통해서 그의 세상을 창조하려 하였다. 그리고 리차드 게리엇은 그가 창조한 세상을 단순히 게임이라는 가상 세계속에서 머물러 있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게임 속에서 만들어 놓은 것들을 현실에서도 재현하려는 노력을 많이 한다. 단지 ..
리차드 게리엇은 마침 MIT에서 경영학 석사를 공부하고 있던 형 로버트 게리엇(현재 미국 NC 소프트 대표로 있다.)의 도움을 받아서 오리진 시스템즈를 창업한다. 이 때문에 개발은 리차드 게리엇이 머무는 텍사스주의 휴스턴에서 진행하고 재정과 홍보 같은 회사의 기타 업무는 메사추세추 주에서 로버트 게리엇이 업무를 처리했다. 로버트 게리엇은 나중에 석사학위를 받고 리차드 게리엇과 함께 텍사스 오스틴에서 합류를 한다. 오리진 시스템즈의 울티마3는 보다 강력해진 그래픽에 파티 시스템을 첨가하였다. 시장에 발매된 울티마3는 역시 롤플레잉 게임의 개척자자라는 평가를 받으며 역시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둔다.어느덧 리차드 게리엇이나 그의 집안에서도 이제 게임 개발은 취미나 장난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바친 가업이 되어..
이공계 학과에서 미국의 명문대학의 하나로 손꼽히는 텍사스 대학에 합격한 리차드 게리엇은 대학에 입학 하기 전에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컴퓨터 랜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컴퓨터 랜드는 애플컴퓨터와 소프트웨어 그리고 각종 소모품을 파는 컴퓨터 상점이었다. 그는 매장에 있는 애플컴퓨터를 이용해서 게임을 개발할 결심을 한다. 그리고 그는 놀랍게도 세계최초로 그래픽을 지원하는 롤플레잉 게임으로 인정받는 알카라베스(Akalabeth) 를 전격적으로 개발한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를 전혀 몰랐다. 단지 컴퓨터 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니깐 자신의 게임을 상점에서 팔 수 있을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을 가졌을 뿐이다. 게임을 완성한 그는 200 달러를 들여서 직접 디스크에 게임을 복사하고 플라스틱 가방..
리차드 게리엇은 우주 연구소에서 우주 비행사로 일하는 아버지 오웬 개리엇(Owen Garriot)의 아들로 영국 캠브리지에서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후 두 달 만에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의 교수로 임명되는데 이때 리차드 게리엇은 미국 텍사스 오스틴으로 이사 오게 된다. 그의 집안은 정말 학구적인 집안의 전형과도 같다. 아버지는 대학교수이고 어머니는 예술학 석사를 받았다. 큰형은 나중에 의사가 되고 다른 형도 석사학위를 받게 된다. 그의 여동생 또한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명문대학으로 일컬어지는 텍사스대학을 나온 그가 어린 시절 공부 때문에 기가 죽을 정도였다고 하니 정말 대단한 집안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휴스턴에 있는 클리어 클릭 고등학교 시절을 잊지 못한다. 고등학교 시절의 여러..
우리는 실감나는 시뮬레이션과 기술적인 혁신으로 세상을 창조한다. 우리는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에 지금까지 비교할 수 없는 정성을 다하여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여 세상을 창조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는 재미있는 세상을 창조 한다는 것이다. 리차드 게리엇은 오늘날 게임산업을 이끈 개척자중에 하나다. 1970년대부터 게임을 개발한 미야모토 시게루는 일본을 대표하는 크리에이터라면 그는 미국을 대표하는 크리에이터이다. 미야모토 시게루가 오늘날의 일본이라는 세계 게임 강국을 만드는데 공헌했다면 그는 미국 컴퓨터 게임 산업의 시작과 함께 하였고 오늘날 이렇게 발전시킨 사람이다. 사실 1980년대 초반만해도 컴퓨터 게임이라는 것은 그냥 한때 일시적으로 유행하고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컴퓨터에 미친..
빌로퍼와 오카모토는 묘한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다. 우선 둘이 회사를 그만 둘 때가 2003년도 6월로 비슷한 시기이다. 그런데 이 둘은 비대해진 회사에서 원하는 게임을 개발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사퇴이유까지 똑같다. 새로운 게임을 개발하지 않고 후속작으로 수익을 챙기려는 회사에 불만이 생겼던 과정도 비슷하다. 무엇보다 기이한 것은 바로 플래그 쉽이라는 회사이름이다. 빌 로퍼가 블리자드를 그만두고 새운 회사의 이름이 플래그 쉽인데 오카모토가 귀무자와 바이오하자드의 시나리오를 전담시키기 위해서 캡콤 재직시에 세운 회사가 바로 플래그 쉽이었다. 회사를 그만 두었을 때 전 직장의 동료 대여섯 명과 같이 독립하는 과정도 비슷하고 다른 대형 게임 퍼블리셔 업체가 서로 스카우트 하려는 광경마저도 똑같았다. 그리고 ..
2003년에 빌로퍼는 전격적으로 블리자드 노스 부사장직을 그만 두었다. 경영난에 봉착한 비벤디가 게임 개발팀과는 대화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회사를 운영하면서 생긴 불만 때문이었다. 그는 블리자드 노스에서 같이 일했던 12명의 직원과 함께 플래그쉽을 전격적으로 창립한다. 그는 현재 2007년 발매를 목표로 PC 용 FPS 게임인 헬게이트 런던을 제작 중에 있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게임이란 배우기는 쉽지만 최고수가 되기는 어렵고 매번 플레이 할 때마다 새로운 재미가 느껴지는 게임이다. 그는 게임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는 우선 매 순간 게임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순간 GTA와 같은 게임아이디어가 떠오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영화를 통해서도 많은 아이디어..
오랜 발매 연기 끝에 1998년도에 출시된 스타크래프트가 처음 등장했을 때 많은 사람들의 실망을 생생히 기억한다. 다른 게임들이 3D효과를 내세워서 강력한 그래픽을 자랑했지만 스타 크래프트는 고작 256색의 2D 그래픽에 불과 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유행을 선도하는 그래픽에 비해서 스타 크래프트의 그래픽은 왠지 모르게 촌스러웠다. 초기의 반응은 듄2의 아류작이라면서 비난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렇지 않아도 블리자드는 웨스트 우드의 커맨드 앤 퀀커를 흉내 내고 있다면서 원색적인 비난을 들었던 때이다. 이러한 비난은 스타크래프트가 발매되기 전 참가했던 E3쇼에서부터 예견됐었다. 뭔가 표현할 수는 없지만 어설픔이 느껴지는 게임 스크린 샷으로 인해서 전세계의 게임 마니아들의 불만이 쌓여 가고 있던 터였다. 그리고..
1994년 미국의 퍼블리셔 업체인 인터플레이에서 발매된 워 크래프트는 10만장 정도의 판매량을 기록하였지만 블리자드라는 회사를 게임 유저에게 알리는 계기가 된다. 워 크래프트에서 음악과 내레이션을 맡은 빌로퍼는 정직원으로 승격된 후에 워크래프트2의 수석 프로듀서가 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능력을 맘껏 발휘하며 당시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의 최고봉으로 인정받았던 웨스트 우드의 커맨드앤 퀀커와 함께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의 양대 산맥이라는 칭호를 얻으면서 워크래프트2를 성공시킨다. 워 크래프트2의 판매량은 무려 100만장이 넘어 섰으며 블리자드는 메이저 회사로 발돋움하게 된다. 재정적으로 여유로 와진 블리자드는 여세를 몰아서 기존에 프로그래밍 외주 하청을 주었던 업체인 콘도르를 인수 합병한다.콘도르는 데이비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