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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역사의 첫 번째 황제 IBM의 시작


자 이제부터는 IT 업계의 제왕으로 군림하며 한때 컴퓨터 그 자체로 통했던 IBM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IBM은 난독증 때문에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쓰기와 적성등의 능력이 부족해서 취직도 어려웠던 허만 홀러리스((Herman Hollerith) 라는 남자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1860년 뉴욕주 버팔로에서 태어난 독일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홀러리스는 난독증이 있어서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고 홈스쿨링으로 교육을 받았다. 탄광의 엔지니어가 되기 위하여 그는 컬럼비아 탄광대학을 겨우 졸업하게 된다. 대학을 졸업해도 쓰기나 적성등의 문제로 변변한 일자리를 구하기도 힘들었던 그는 간신히 워싱턴에 있는 미국 통계국에 임시직으로 일자리를 얻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셔먼 빌링스((Kate Sherman Billing) )라는 아가씨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어느 날 홀러리스는 여자친구의 초대로 집을 방문하게 된다. 그녀의 아버지 존쇼 빌링스 역시 통계국의 관리자였다.  홀러리스를 만난 존 쇼 빌링스는 인구조사의 어려움을 토로하였다.   1880년대 미국은 수많은 이민자들이 모여들며 인구가 폭발하던 시기이다. 1790년 380만명이었던 인구가 1860년에는 3180만명으로 늘어났다. 1888년 미국 통계국에서는 대규모 인구 통계조사를 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였다. 과거의 방식으로 통계를 내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돈과 인력 그리고 8년이라는 시간이 투입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손으로 하는 수작업 방식에는 한계가 있으니 전자기기를 이용하자는 게 통계국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홀러리스는 미국 정부의 어려움을 덜어주겠다는 거창한 목표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여자친구 아버지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새로운 인구조사방법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다. 그런데 기차를 타고 가다가 역무원이 승객들의 표에 구멍을 뚫는 모습을 보고 머릿속에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기차표에는 출발지와 도착지 이외에도 승객의 머리나 눈의 색깔들 같은 정보들에 구멍을 뚫어서 구분하였다. 그는 여기에 한가지의 아이디어를 더 접목하였다. 바로 자동 연주 피아노였다. 놀랍게도 1800년대부터 자동 피아노가 있었다. 두꺼운 종이에다가 음표에 따라서 구멍을 뚫어 놓으면 피아노가 이를 인식하고 자동으로 연주해주는 것이다. 종이에 구멍을 뚫고 이를 전자적으로 인식할 수 있었던 기술이 이미 그 당시에 존재했던 것이다. 


홀러리스의 아이디어대로라면 조사원은 인구조사 대상자의 신상정보에 따라서 정해진 순서대로 구멍을 뚫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발명된 천공카드는 나중에 홀러리스 카드 혹은 IBM 카드라고 부르게 된다. 그런데 홀러리스의 진짜 능력이 발휘된 것은 타뷸레이팅 머쉰(Tabulating machine)이다.  천공카드에 찍힌 구멍에 따라서 데이터들을 읽어내어 이를 정보 별로 분류하고 정렬하는 전자기기로 컴퓨터의 원조 격이라고 할 수 있다.


1890년 홀러리스의 천공카드와 타뷸레이팅 머쉰이 인구조사를 위해 사용되었다. 8년이 넘게 걸렸던 인구조사는 불과 2년만에 끝냈다. 그리고 미국정부는 5백만달러의 예산을 절감할 정도로 놀라운 성과를 발휘하게 된다. 이는 원래 예상한 금액보다 무려 10배나 적은 비용이 사용되었음을 뜻하였다. 홀러리스의 타뷸레이팅 머쉰은 캐나다, 오스트리아, 필리핀, 스코틀랜드, 러시아, 영국, 덴마크 등에서도 사용되며 인기를 끌게 된다.


홀러리스는 자신이 만든 천공카드와 타뷸레이트 머쉰의 우월함을 입증하게 되자 직접 타뷸레이팅 머신 컴퍼니 (Tabulating Machine Company)를 창업하여 사업에 뛰어들게 된다. 홀러리스의 발명품은 단순히 인구조사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회계사무소, 백화점, 철도회사, 정유업체, 화학 제조업체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게 된다.


1911년 홀러리스는 2백3십만 달러를 받고 자본가인 찰스 플린트(Charles Flint)에게 자신의 회사 타뷸레이팅 머쉰 컴퍼니를 매각한다. 그리고 타뷸레이팅 머신은 기계식 시간 기록기를 제조하는 ITR(the International Time Recording Company) 그리고 저울업체인 컴퓨팅 스케일 코퍼레이션 (Computing Scale Corporation)과 합병하여 IBM의 전신인 CTR로 재탄생 한다.


IBM의 아버지 토마스 왓슨


1914년 오늘날도 가장 존경 받는 경영자중의 하나로 뽑히는 토마스 왓슨이 회사의 사장으로 선임되며 회사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토마스 왓슨(Thomas J. Watson)은 1874년 뉴욕에서 태어난다. 아버지는 농장을 운영하였는데 토마스 왓슨은 어린 시절 농장에서 가족을 위하여 일을 하였다.  집이 화재로 전소되기도 하였고 당시 미국 사정은 불황을 겪던 시기라 토마스 왓슨의 어린 시절은 매우 어렵고 힘들었다. 건강도 좋지 못해서 그는 천식을 앓았고 몸은 삐쩍 말라 있었다. 





그는 에디슨 아카데미와 밀러 상업학교를 다닌 후에 직업 훈련소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학교에서 별로 배울 것이 없다는 생각으로 중퇴를 결정하고 주급 6달러를 받는 경리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그 후 철물상으로 직장을 옮기는데 이곳에서 처음으로 영업직에 뛰어들게 된다. 왓슨은 이곳에서 피아노 같은 악기를 판매하는 영업사원이 된다. 지금은 역사상 세계최고의 세일즈맨으로 존경 받는 토머스 왓슨이지만 일주일에 고작 10달러 밖에 벌지 못할 정도로 실패를 맛보고 만다. 


토머스 왓슨은 두 번째 도전으로 재봉틀 판매를 시작한다.  이제 겨우 영업사원으로 적응을 하던 어느 날 높은 판매고를 자축하기 위해서 술집에 들른다. 그리고 술을 마시다가 그만 말과 마차 그리고 회사물품들을 도둑맞고 만다. 이 때문에 왓슨은 해고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물건을 잃어버렸다는 나쁜 평판 때문에 1년동안 일자리를 얻지 못하게 된다. 술 때문에 한 순간에 실업자 신세가 된 왓슨은 술과 관련된 사업은 절대 하지 않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실제로 IBM을 경영할 때 왓슨은 엄격한 음주규칙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그 후 주식브로커도 해보고 직접 정육점을 운영했지만 실패만을 경험하게 된다. 


정육점을 다른 사람에게 넘긴 토머스 왓슨은 가게에서 사용하고 있던 금전등록기의 인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조사인 NCR을 찾아간다. 그는 이곳에서 그에게 진짜 세일즈맨으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는 멘토이자 스승인  존 레인지(John Range)를 만난다.  사교성이 있고 넉살 좋은 토머스 왓슨은 레인지에게 일자리를 부탁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레인지의 부하직원이 되어 다시 영업의 세계로 뛰어든다.


레인지는 엄격하고 혹독하게 왓슨을 트레이닝 시켰다. 왓슨은 레인지가 원하는 것을 충실하게 따랐고 충성스런 부하직원으로써 레인지의 영업비결을 전수받았다. 레인지 덕분에 왓슨의 영업 실력도 날로 늘어났다. 왓슨은 불과 9개월만에 버팔로의 총판매 책임자가 되었다.  그리고 4년후 27살의 나이에 로체스터 지점을 책임지게 된다.  로체스터는 원래 영업실적이 부진한 곳이었는데 왓슨이 부임한 이후 뛰어난 실적을 기록하면서 회사로부터 주목 받는 인물이 된다.


1912년은 토머스 왓슨에게 행복과 불행이 교차하던 해이다. 1912년 그러니깐 그의 나이 39살이 될 때까지 미혼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1912년 사교클럽에서 주최한 파티에서 29살의 재닛 키트리지(Jeannette Kittredge)를 만나게 된다. 만찬회에 모인 사람 중 유일하게 술을 마시지 않은 사람은 오직 왓슨과 재닛이었다. 서로 술 한잔 마시지 않은 게 신기했던지 둘은 대화를 나누게 되고 곧 사랑에 빠지게 된다. 


1912년은 왓슨이 평생 사랑하게 되는 짝을 만나는 해이지만 사실 직장에서는 엄청난 위기를 겪고 있었다. 정부에서는 NCR과 직원 30명을 상대로 반독점법으로 기소했다. 로체스터 지점을 맡은 후 실적이 좋아지자 NCR의 창업자인 존 패터슨(John H. Patterson)은 왓슨을 따로 몰래 불러서 비밀업무를 지시했다. 이에 따라서 왓슨은 1903년과 1907년까지 NCR이 세운 위장회사를 운영했다. 


NCR은 중고 금전등록기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사람들이 자사로부터 신제품을 구입하지 않고 중고를 선호하면서 매출에 손해를 보게 되었다. 그러자 회사에서는 왓슨에게 직접 중고매장을 세워서 다른 중고매장에 타격을 주도록 하였다. 왓슨은 중고인 금전등록기를 일부러 비싸게 구입하는 한편 역시 고의적으로 중고품들을 싸게 손님들에게 재판매 했다. 중고 금전등록기를 판매하고 구입하려는 사람들이 왓슨의 가게에 몰리게 함으로써 금전등록기를 거래하는 중고 도매상들이 문을 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NCR 에서는 다른 경쟁업체들을 몰아내기 위해서 중상모략 하거나 운송업체를 통해서 경쟁 제품이 파손되게 하는 등 각종 방법을 동원하여 시장을 독점하게 되었다. 회사의 충실한 사원이었던 왓슨 역시 자신이 저지른 범죄의 심각성을 모르고 존경하는 회사 창업자 패터슨을 위해 충성을 다했다.


1913년 NCR은 반 독점법 위반 판결을 받고 직원인 왓슨은 1년의 징역형을 받는다. 그런데 생각지 않았던 한가지 사건이 발생하면서 극적인 반전이 만들어진다. 뉴욕에서 미국역사상 최악의 홍수가 발생하면서 시 전체가 물에 침수되고 사람들이 고립되었다.  다행히 NCR은 고지대에 위치해 있어서 물에 잠길 위험이 없었다.  


NCR은 전사적으로 홍수 재난에 대처하였다. 천 여명의 이재민들을 NCR에 대피시키고 구호물자와 각종 편의 시설을 제공하면서 마치 재난 대책 위원회처럼 움직였다. 왓슨은 이재민들에게 필요한 의약품, 식량, 옷가지, 담요, 식수등을 공급하는 일을 하였다. 구호물품의 양이 얼마나 많았던지 식량의 경우 트럭 39대와 기차가 동원될 정도였다. 홍수 속에 맹활약했던 NCR덕분에 창업자 패터슨은 일약 미국의 영웅으로 떠오르게 된다. 미국 전역에서는 반 독점법 판결을 받은 NCR에 대한 청원 운동이 일어난다. 결국 대통령이었던 윌슨은 사면문제를 고민하게 된다.


여론이 유리하게 돌아가자 패터슨과 왓슨은 상고심에서 무죄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13년 4월 한국 나이로 40살 이었던 왓슨은  재닛과 결혼을 하게 된다.  반독점 문제도 잘 해결될 것 같았지만 가을이 되자 상황은 급변하게 된다. 일약 국민적인 영웅으로 떠오른 패터슨은 처음과는 다르게 시간이 갈수록 반 독점법 판정을 받은 직원들을 냉랭하게 다루었다. 회사 내에 반독점법 판정을 받은 임원들과 그렇지 않은 임원 사이에 알력다툼이 생겨났다. 


왓슨이 직원들을 상대로 연설을 하는데 패터슨이 느닷없이 말을 가로막고 다른 임원을 거론하며 그 임원의 칭찬을 늘어 놓을 정도였다. 왓슨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수모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이 회사에 남아 있을 수 없음을 절실하게 깨 닫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회사에서 쫓겨났다. 왓슨은 너무나 분하고 억울하였다. 17년간 충성을 다 받친 패터슨이 너무 가혹하게 자신을 내쳤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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