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역사의 첫 번째 황제 IBM의 시작 자 이제부터는 IT 업계의 제왕으로 군림하며 한때 컴퓨터 그 자체로 통했던 IBM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IBM은 난독증 때문에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쓰기와 적성등의 능력이 부족해서 취직도 어려웠던 허만 홀러리스((Herman Hollerith) 라는 남자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1860년 뉴욕주 버팔로에서 태어난 독일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홀러리스는 난독증이 있어서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고 홈스쿨링으로 교육을 받았다. 탄광의 엔지니어가 되기 위하여 그는 컬럼비아 탄광대학을 겨우 졸업하게 된다. 대학을 졸업해도 쓰기나 적성등의 문제로 변변한 일자리를 구하기도 힘들었던 그는 간신히 워싱턴에 있는 미국 통계국에 임시직으로 일자리를 얻게 된다. 그곳에서 ..
1977년 개인용 컴퓨터 빅뱅의 시대가 열리다 여기서 잠깐 애플 II 컴퓨터의 라이벌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래야만 당시 애플 II 컴퓨터가 활약했던 시장을 조금이나마 더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77년은 개인용 컴퓨터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한 해이다. 초창기 개인용 컴퓨터 시장을 창조한 애플II 컴퓨터를 비롯하여 탠디사의 TRS-80 그리고 코모도어 PET이 등장한 해이기 때문이다. 탠디사는 원래 가죽을 판매하는 회사였고 자회사로 전자제품을 판매하는 체인점인 라디오 셰크(Radio Shack)를 가지고 있었다. 라디오 셰크의 고객인 돈 프렌치는 (Don French) MITS의 알테어 컴퓨터를 구입한 후에 이에 영감을 얻어 독자적인 컴퓨터를 만든다. 이를 라디오 쉐크의 판매담당 부사장인 존 로치(..
애플컴퓨터를 만들 때 아타리에서 만난 직장동료들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이미 이야기를 하였다. 따지고 보면 아타리가 성공을 거둔 터전 아래서 애플의 성공이 확장되었다 말 할 수 있다. 단순히 개발뿐만 아니라 자금투자 과정에서도 결국 아타리의 도움이 있었던 것을 보면 영웅이라는 게 혼자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환경이 갖춰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잡스는 놀란 부쉬넬에게 5만달러를 투자하면 회사의 주식 3분1을 넘겨주겠다고 제안했지만 다른 사업에 이미 많은 자금을 투자한 그는 여유가 없었다. 그는 이때를 평생 후회하게 된다. 대신 놀란 부시넬은 투자자인 돈 밸런타인을 만나보라고 한다. 벤처 투자 회사인 세쿼이아 캐피탈의 창업자인 돈 밸런타인은 이미 아타리에 투자를 해서 성공을 거둔 인물이다. 스티브 잡..
애플 I 컴퓨터가 판매를 시작할 즈음에 이미 애플 II 컴퓨터에 대한 계획이 구체화되었다. 애플 I 컴퓨터는 엄밀히 이야기하면 완제품이 아니었다. 애플 I 컴퓨터는 일종의 전자회로 기판을 판매한 것이었다. 제품을 구입한 고객은 키보드, 케이스, 전원 장치등을 따로 구입해서 조립해야 했다. 애플 I 컴퓨터는 컴퓨터에 대한 지식이 해박한 컴퓨터 애호가들을 위한 것이지 절대 일반인들을 위한 제품은 아니었던 것이다. 제작된 컴퓨터도 150대정도에 불과했는데 대부분 상점에 넘긴 제품이기 때문에 실제 판매량은 얼마나 되는지 아무도 모른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바이트숍에서는 재고로 남겨진 애플 I 컴퓨터 때문에 큰 골치였다고 한다. 잡스는 가전제품처럼 누구나 쉽게 접근 할 수 있는 컴퓨터로써 애플 II를 기획한다. ..
워즈니악이 애플 I 컴퓨터를 완성하는 동안 잡스는 애플이라는 회사가 본궤도에 오를 수 있도록 종횡무진 한다. 그는 우선 아타리에서 론 웨인을 영입한다. 40대인 그는 아타리에서 판매를 담당하며 고객을 확보하는 일을 하였다. 그가 경험이 많은 론 웨인을 합류시킨 이유는 나이가 어린 잡스와 워즈니악 사이에서 중재자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는 동업계약서를 쓸 때부터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으며 회사의 법적인 문제와 회사로고와 매뉴얼 등을 작성했다. 애플 I 컴퓨터를 생산하고 제조하기 위해서는 인쇄 회로 기판이 필요했다. 스티브 잡스는 아타리에서 맺은 인맥을 다시 한번 이용했다. 아타리에서 게임보드를 설계하는 하워드 캔틴에게 잡스는 애플 I 컴퓨터의 인쇄 회로판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다. 캔틴은..
아타의 창업자 놀란 부쉬넬은 퐁의 성공 덕분에 비디오 게임의 아버지를 불리 우는 전설적인 인물이 된다. 아타리는 게임도 하고 돈도 벌 수 있다는 광고문구로 구직자들을 유혹하였다. 마침 아타리의 구인 광고를 본 스티브 잡스는 회사에 지원을 하였고 바로 취직이 되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재미있다. 샌들에 허름한 옷차림을 하고 무작정 아타리의 본사 건물로 쳐들어간 잡스는 자신을 채용해달라고 생떼를 부렸다. 이에 놀란 안내 직원은 당시 개발팀을 이끌었던 알 알콘에게 어떤 미친 녀셕이 나타났는데 만나 볼 건지 아니면 경찰을 불러야 할건지를 묻는다. 실리콘 밸리에서 인기직장이었던 아타리는 원래 대학 중퇴자를 별로 뽑지 않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알 알콘은 미치광이처럼 취직을 시켜달라고 말하는 잡스를 별다른 채용 절차 ..
블루박스 이야기는 잡스가 고등학교 3학년 그리고 워즈니악이 버클리대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블루박스사건 이후 잡스는 부모님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리드대학교에 입학한다. 대학에 들어간 스티브 잡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학 생활에 실망하게 된다. 마음에 들지 않는 강좌를 필수과목으로 반드시 들어야 한다는 규정이 싫었고 대학이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부모님의 어려운 재정상황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대학을 자퇴한 후 잡스는 대학에 남아서 관심이 가는 강좌들을 수강하였다. 돈이 별로 없었던 잡스는 빈 병을 모아서 용돈을 마련하였고 숙식은 친구 집에서 해결하였다. 한끼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서 11km를 걸어서 하레 크리슈나교 사원을 가기도 하였다. 그곳에서는 공짜로 식사를 제공..
HP, 실리콘 밸리의 문화를 만들어 내다. 57년 HP가 기업상장을 하면서 빌과 팩커드는 큰 부자가 되었다. 60년대와 70년대는 해외진출을 통해서 회사의 고속성장을 이어갈 수 있었다. 빌이 스티브잡스의 전화를 직접 받고 일자리까지 알아봐주었을 때는 HP가 작은 벤처 기업이 아니라 이미 대기업으로 성장하던 때이다. CEO였던 팩커드는 이미 유명인이 되어서 빌에게 CEO자리를 맡기고 미국정부의 요청에 따라 국방부 차관으로 일할 정도였다. 일례로 팩커드는 3년후에 HP로 돌아오는데 그가 HP에서 일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한 금전적 손해가 무려 2000만달러였다고 한다. 그렇게 큰 회사의 CEO가 고작 고등학교 1학년생의 전화를 직접 받고 원하는 부품을 보내주고 직접 일자리까지 제안해주는 것 그게 바로 실리콘밸리..
빌 휴렛과 스티브 잡스의 특별한 인연 스티브 잡스의 첫 번째 축복이 그의 양 부모였다면 두 번째 축복은 그가 살던 동네이다. 스티브 잡스가 살던 곳은 과수원이었던 지역이 실리콘밸리로 탈바꿈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스티브 잡스는 자연스럽게 미래기술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된다. 스티브 잡스는 1995년 스미소니언 박물관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실리콘 밸리에서 자란 것이 정말이지 행운이었습니다. 제가 열 살이나 열한 살쯤 되었을 때 저는 첫 컴퓨터를 보게 되었습니다. 나사(NASA)의 에임스 연구 센터였습니다. 지금 같은 컴퓨터는 아니었고 어떤 전기 단자였는데 이론적으로는 전선들이 다른 쪽으로 연결되어있는 컴퓨터였습니다. 저는 이 컴퓨터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데스크톱 컴퓨터를 본 것은 휴렛 팩커드였..
멀티라이터의 IT 왕조실록 2.0 (1화) 스티브 잡스 태어나고 버려지고 구원받다. 인류의 삶을 바꾸고 지금 현재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IT 라는 이 거대하고 웅장한 이야기의 시작을 두고서 많은 고민을 했다. 첫 번째 페이지를 쓰다 지우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나름 멋진 문장으로 포장된 단락까지 만들어냈지만 이를 포기하고 결국 스티브 잡스 이야기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스티브 잡스는 이미 수많은 매체에서 언급되었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스티브 잡스에 대해서 알고 있다. 그래서 스티브 잡스를 언급하는 순간 지겨움과 식상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많은 생각과 고민들을 거듭해도 결국 시작은 스티브 잡스 여야만 했다. IT 왕조 실록에서는 하나의 왕조를 이루었던 수많은 IT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