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마리오와 젤다의 전설을 개발하여 게임의 신으로 불리우는 미야모토 시게루는 1952년 교토 외곽의 조용한 농촌마을인 소노베에서 태어난다. 어린 시절 그는 틈만 나면 밖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다. 논에서는 야구를 하고 시냇가에서는 물고기를 잡았다. 숲에서는 친구들과 탐정놀이를 하면서 즐거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소노베는 시내와 멀리 떨어진 전원마을인 관계로 주변에는 문화시설이 없었다. 그리고 미야모토 시게루의 집에는 텔레비전도 없었다. 그래서 그가 문화생활을 즐기는 때는 한달에 한번 기차를 타고 교토를 방문할 때였다. 그는 교토에 가면 극장에서 백설공주나 피터팬 같은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을 관람하기 좋아했다. 그가 조금 더 성장해서 마침내 집에 텔레비전이 생겼을 때는 NHK에서 방송하는 인형극에 빠지기도 ..
윌 라이트는 명예의 전당에 오른 게임 크리에이터 중에서 가장 열정적인 사랑을 한 사람일 것이다. 그의 부인인 조엘 존스는 윌라이트보다 무려 12살이나 많다. 조엘 존스는 창문이 깨지는 사고로 몸에 상처를 입고 고향으로 잠시 요양을 오게 된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그도 마침 방학을 맞이하여 고향에 돌아온다. 그가 어린 시절의 친구 집에 잠시 방문하게 되는데 이때 마침 친구의 큰 누나인 조엘 존스를 보게 된다. 그와 조엘 존스는 나이에 상관없이 서로에게 빠져들었고 열정적으로 사랑하기 시작한다. 이때 조엘 존스가 다시 몸이 완쾌되자 원래 자신의 직장이 있는 캘리포니아로 돌아가게 된다. 그는 자신의 사랑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결국 다니고 있던 대학을 포기하고 조엘 존스를 따라서 캘리포니아로 가게 된다. 완전히 ..
역시 심시티라는 타이틀은 그 이름만으로도 팔리는 맥시스의 최고 상품이었고 회사를 위기에서 구해주었다. 심시티 2000 이후에 맥시스의 투자자들은 회사를 공개해서 주식을 공모하자고 한다. 윌 라이트는 회사공개를 원하지 않았지만 처음 투자를 받을 때의 조건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만다. 1995년에 맥시스는 기업을 공개하고 3800만 달러의 기업가치를 인정받는다. 이제 맥시스는 직원 수 300명의 중견기업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었다. 불과 6년 전에 제프 브라운의 아파트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작업에 몰두했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놀라운 변화였다. 하지만 맥시스가 주식 시장에 상장하면서 회사는 점차 하락세로 돌아선다. 회사의 분위기에서 활기가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투자자들의 간섭..
완성된 게임을 보자 브로더 번드는 이번엔 의외로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완벽한 확신은 아니었다. 브로더 번드가 유통을 담당하되 포장비용과 같은 제반 경비에 대해서 맥시스가 비용을 부담하는 것이었다. 기분이 나쁠 수 도 있는 이런 제안에 대해서 정작 그는 순순히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자신도 게임의 성공을 비관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어찌되었든 유통을 해준다는 브로더 번드가 무조건 감사했을 뿐이다. 게임이 발매하자 마자 그의 예측은 정말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만다. 게임은 순식간에 입 소문이 번지면서 1989년 한해 동안 무려 300만장이나 판매되는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당시로써는 이례적으로 시사잡지인 뉴스위크지에서 심시티를 집중 조명 하면서 기존 상식을 뛰어 넘는 최고의 게임이라고 극찬하였다. 그 ..
윌라이트는 게임이 단순히 놀이가 아닌 그 이상이 되기를 바랬다. 그는 자신이 완성시킨 발겔링만의 습격을 실제로 게임플레이 하는 것보다는 만드는 과정이 훨씬 재미있었던 체험을 곰곰이되씹어 보았다. 발겔링만의 습격을 제작할 때 게임의 배경으로 쓰이는 사물들을 마음 데로 배치하거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프로그램의 일종인 맵 에디터를 가지고 스테이지를 디자인 했던 기억을 통해서 그는 새로운 결론을 내린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만드는 창조의 순간이야 말로 참된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그날 이후 게임 플레이어가 게임속에서 직접 뭔가를 만들면서 창조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게임을 개발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는 새로운 게임 개발을 위해서 수많은 책을 읽었다. 그리고 도시역학과 시스템 역학의..
윌 라이트는 1960년 7월 20일 미국의 대표적인 남부도시인 애틀란타 조지아에서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 윌리암 라이트는 화학자이며 동시에 라이트 플라스틱사의 사장이었다. 하지만 윌 라이트가 아홉 살이 되던 해에 사망하고 만다. 그의 어머니 베버리 에드워즈는 자식들의 양육을 위해서 그녀의 고향으로 이사를 간다. 이때부터 그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한다. 친구들에게는 괴짜 혹은 기인으로 불릴 정도로 그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습득하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책 읽기에 몰두하기도 했던 그는 이때 배운 것들이 지금도 자신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또 다른 취미는 프라모델 만들기였다. 각종 로보트와 배 같은 것을 만들어서 자신의 방안에 장식하는 것을 즐겼다. 또한 이러한 취미가..
게임은 소프트웨어 장난감이지요. 윌 라이트는 게임의 차원을 높인 인물이다. 그가 게임계에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게임이라는 것은 적과 경쟁하거나 싸워서 승리하는 게임이었다. 성공과 실패가 명확한 만큼 게임 플레이어가 하는 것도 일방적으로 정해져 있었다. 정해진 일을 얼마나 능숙하게 해내느냐가 결국 승패의 조건이었다. 물론 롤플레잉 게임처럼 머리를 사용하는 지능형 게임이 있기는 했었다. 하지만 롤플레잉 게임은 악에 물들어진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주인공이 악의 무리들과 싸워서 승리해야 한다는 엔딩 조건이 있었다. 게임유저는 게임 기획자가 의도한 데로 일정한 룰을 따라서 플레이 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선입관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것이다. 애초에 그의 게임에는 승리 조건이 없었다. 그러므로 역시 엔딩 ..
한국 최고의 천재 게임 크리에이터를 뽑으라고 하면 단연 송재경 XL 게임즈사장일 것이다. 송재경 사장이 게임을 하나 만들 때 마다 한국의 게임 산업은 한 단계씩 발전하는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는 이를 직접 체험해왔다. 송재경 사장이 게임을 하나 히트할 때마다 나의 월급은 두 배씩 올랐던 것이다. 송재경 사장이 게임시장의 파이를 키웠기 때문이다. 또한 동아리 수준에 머물렀던 한국 게임 개발사들을 세계의 유명 회사와 경쟁하게 만든 것은 송재경씨의 뛰어난 게임들 덕분이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송재경씨의 영향력을 확인 할 수 있는 사건이 2005년 10월에 일어났다. 네오위즈에서 송재경 사장의 게임을 퍼블리싱 한다는 계약 소식이 전해지자 다음날 네오위즈의 주가는 상한가를 쳤다. 게임을 잘 모르는 사..
팀 스위니와 존 카멕은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천재 게임 프로그래머이자 업계가 주목하는 라이벌이다. 이 둘은 모두 직접회사를 창업해서 세계 최고의 3D 게임 엔진을 거의 혼자 힘으로 완성했으며 회사의 오너이지만 개발현장에서 직접 프로그래밍을 하는 점들이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또한 둘 다 미야모토 시게루를 존경하고 있으며 그들이 개발한 코맨더 킨과 재즈 잭래빗은 횡 스크롤 액션게임으로 슈퍼 마리오와 아주 많이 닮아있다. 2D게임으로 시작했지만 이내 곧 세계최고의 엔진을 개발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는 것이 너무나 아이러니 하다. 3D 엔진의 시작은 존 카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덕분에 명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당연히 존 카멕이 앞서 있었다. 하지만 최근 3D 엔진 시장에서는 언리얼(Unreal)이 확실히 우위..
울펜 슈타인 3D의 성공 이후에도 존 카멕의 열정에는 휴식이 없었다. 그는 더욱 강력한 기술로 전세계 게임팬들에게 충격을 선사하니 그것이 바로 둠이었다. 둠의 성공으로 Id 소프트웨어는 최고의 게임 개발사로 인정을 받았으며 존 카멕 자신은 세계 최고의 스포츠카인 페라리 자동차를 구입할 정도로 큰 부자가 되었다. 둠은 영화 에일리언과 이블데드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리고 둠이라는 제목은 컬러 어브 머니에서 톰 크루즈가 하는 대사를 듣고서 그 어감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선택했다. 둠이라는 게임은 오직 존 카멕의 기술로 이루어진 게임이다. 게임 개발 자체가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존 카멕의 프로그래밍 기술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면서고 시작된 게임이다. 존 카멕이 네트워크를 이용해..
처음 Id 소프트웨어를 창업한 그들은 안정적인 수익을 거두기 위해서 당시 인기 게임이었던 코맨더 킨 시리즈를 6탄까지 만들었다. 한편 존 카멕은 오래 전부터 3D 그래픽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감이 부족한 2D액션게임으로는 분명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고 뭔가 변화를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고안한 것은 3D기술을 게임에 구현하자는 것이었다. 리더인 존 로메오도 그의 생각에 동의하였고 2D 액션게임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기 위한 게임을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자고 하였다. 그것이 바로 1991년도에 발매된 호버탱크 원(Hover Tank One)과 카타콤3D(Catacomb 3D)였다. 코맨더 킨에서부터 파트너 관계를 맺고 유통을 책임졌던 APOGEE사의 CEO인 스캇 밀..
모든 회사의 취업제의를 한결 같이 거절하던 존 카멕이었지만 운명적으로 존 로메오를 만나며 그의 생각을 바꾸게 된다. 존 로메오는 이미 컴퓨터 게임계에서 뛰어난 실력으로 인정받는 프로그래머였다. 존 카멕은 처음으로 자신이 뭔가를 배울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자 존 로메오가 같이 일하자는 제의를 선뜻 받아들인다. 당시 존 로메오는 소프트디스크(SOFTDISK)라는 회사에서 일했다. 소프트 디스크는 매달 발행되는 잡지와 함께 번들로 각종 프로그램과 게임을 제공하는 회사였다. 존 로메오는 여기서 게임 개발을 총책임지는 사람이었다. 같이 일을 하게 된 존 카멕과 존 로메오는 호흡이 척척 맞았고 많은 게임 프로그램들을 빠른 시간 안에 개발을 하여서 소프트 디스크에 큰 수익을 거두게 해주었다. 이들은 회사 내에..
1970년 생인 존 카맥은 어렸을 때부터 천재성을 가지고 있는 소년이었다. 비록 남들보다 말을 늦게 시작하였지만 그는 초등학교를 입학하면서부터 뛰어난 학습능력을 선보였다. 학교시험에서 만점을 받는 것은 기본이었고 이미 중학교 1학년 때 중학교 3학년의 모든 과목들을 이해하고 있었다. 또한 이미 자신만의 언어체계를 개발해서 독특한 기호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자신이 남들보다 훨씬 똑똑한 존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아이들과 노는 것에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자신이 머리 속에서 생각하는 것과 친구들이 관심 있어 하는 것에는 이미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운명은 12살 때 이미 결정이 났다. 처음 애플 컴퓨터2를 보는 순간 그는 자신의 인생을 결정..
한가지 일에 열심히 일하는 것은 성공을 위한 가장 실질적인 방법이다. 오직 목표에만 초점을 맞춰라. 그리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다음 발걸음을 내딛더라. 만약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길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다른 길도 함께 가보고 더 나은 것이 어떤 것인지 찾아내라 존 카멕은 그야말로 천재라는 말 이외에는 표현 할 수 없는 역사상 최고의 슈퍼 게임 프로그래머이다. 그는 게임계에 FPS(First Person Shooter:1인칭 액션 슈팅게임)라는 게임 장르를 창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앞선 3D 기술로 전체 게임 프로그래밍계에 일대 혁명을 불러 일으켰다. 그가 처음 세상을 놀라게 한 작품은 코맨더 킨(Commander Keen)이였다. 런 앤 액션 게임방식으로 한때 슈퍼 마리오3의 카피게임이라는 비..
파이널 환타지의 최고 라이벌 게임은 단연 드래곤 퀘스트이다. 사실 파이널 환타지는 드래곤 퀘스트의 성공에 편승해서 2등이라도 되자는 심정으로 만든 게임이다. 하지만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게임이 진화하면서 라이벌 관계가 형성되었다. 드래곤 퀘스트를 만든 게임 크리에이터가 바로 호리이 유이지이다. 게임만큼이나 호리이 유이지와 사카구치는 많은 부분에서 비교의 대상이다. 실제 둘은 작업스타일이나 게임관에 있어서 많은 부분이 다르다. 작업스타일에 있어서 사카구치는 365일 내내 일중독자처럼 일에 몰두하는 스타일이라면 호리이 유이지는 일 외의 것을 많이 즐기며 일하는 중에도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또한 사카구치는 게임의 재미에 감동을 주기 위해서 그래픽의 비주얼이나 사운드에 많이 신경을 쓴다면 호리이 유이지는 ..
사카구치가 말하는 게임 미스트 워커의 로고는 사카구치가 그의 딸과 같이 만든 것이다. 20번이나 퇴짜를 놓으면서 딸을 괴롭혔다고 웃는 그를 보면 그와 가족들의 관계를 쉽게 예상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게임에 재미뿐만 아니라 감동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노력하는 크리에이터다. 그의 목표는 게임으로 소설이나 영화가 줄 수 없는 감동의 눈물을 선사하는 것이다. 영화는 실패했지만 그는 영화제작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특히 그가 절실히 깨달은 것은 게임 제작이 본격화 되기 전의 프리 프로덕션단계의 중요함이다. 프리 프로덕션에서 가능한 많은 것을 실험해 본 다음에 본격제작에 들어가야 그만큼 시행착오가 줄어들 것 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는 게임 크리에이터에게 시간관리가 중요하다고 ..
스퀘어를 그만 두게 된 사카구치는 일본에서 다시 하와이로 돌아가서 두문불출하며 종적을 감춘다. 스퀘어와의 결별은 그에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는 모든 것을 그냥 잊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게임과 관련된 일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인생을 즐기면서 그는 최대한의 휴식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세상은 살만한 곳이고 멋진 곳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여유로운 삶을 살아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안하고 1년 6개월의 세월이 흐르던 어느 날 하와의 바다를 산책하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이 40이 넘어서 어린 아이처럼 우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맘껏 눈물을 흘렸다. 그 동안 꾹꾹 참고 참았던 괴롭고 힘..
파이널 환타지의 성공 이후 스퀘어는 일본 최고의 게임 업체가 되어 있었다. 실속은 에닉스였지만 외형적인 측면에서는 스퀘어가 최고였다. 에닉스는 오직 드래곤 퀘스트 게임하나에 매진하고 있는 동안 스퀘어는 다양한 게임들을 동시다발적으로 개발하였다. 로맨싱 사가, 크리노 트리거, 성검 전설등 많은 프렌차이즈 게임들을 보유하게 되면서 회사의 자금도 탄탄하여 졌다. 그리고 이러한 안정과 성공은 사카구치가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계기가 된다. 원래 스토리가 있는 게임에서 강점을 보였던 그는 이제 100% 스토리로만 이루어진 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바로 그때 그가 애플컴퓨터와 드래곤 퀘스트를 처음 보았을 때의 충격을 다시 한번 겪게 되니 그것이 바로 토이 스토리이다. 100% 컴퓨터 그래픽 에니메이션인 토..
드래곤 퀘스트의 놀라운 성공의 뒷 배경에는 사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드래곤 퀘스트는 발매 4개월 전부터 기대되는 게임 1위였다. 드래곤 퀘스트를 개발중인 에닉스는 무명의 회사였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었을까? 그것은 일본 최고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만화잡지인 소년점프에서 밀어주는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드래곤 퀘스트의 아버지 호리이 유이지는 소년점프에서 원고를 기고하는 사람이었다. 그 덕분에 소년점프 편집부 사람들과는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마침 소년점프에서는 게임 관련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인기를 얻자 호리이 유이지에게 지금 만들고 있는 드래곤 퀘스트의 게임 제작 과정을 원고로 써달라고 부탁한다. 그래서 호리이 유이지는 자신이 참여하고 있는 드래곤 퀘스트의 게임 제작과 관련해서 일어나는..
계속 되는 게임의 실패! PC 방의 주인인 미야모토 마사시는 스퀘어의 창립자이고 현재 스퀘어 에닉스의 최대 주주로 유명하다. 미야모토 마사시는 다른 사람 보다 먼저 컴퓨터의 가능성을 알아 채고 소프트웨어 사업에 진출하게 된다. 하지만 인적 네트워크가 부족했던 그는 개발자들을 유인하기 위해서 PC방 사업을 계획한다. 당시까지 만해도 애플의 컴퓨터 가격은 80만엔(우리 돈 800만원)이 넘을 정도로 초고가였다. 그래서 컴퓨터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은 소수였고 PC방까지 찾아오는 사람은 개발자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실력을 갖춘 프로그래머였다. 이런 현실을 깨달은 미야모토 마사시는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이라는 뜻을 가진 스퀘어를 PC방으로 창업해서 개발자들을 모을 생각이었다. 미야모토 마사시는 애초에 P..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1962년 11월 25일 이바라키현에서 태어난다. 그가 처음 접한 게임은 12살 때 백화점 옥상에서 했던 퐁이다. 그리고 그는 동생과 함께 닌텐도의 게임&워치나 장난감 광선총을 가지고 즐겁게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게임은 그에게 하나의 놀이에 지나지 않았고 자신이 게임을 개발할 것이라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직접 스쿨 밴드를 조직해서 많은 곳에 공연을 다닐 정도로 음악에 자신을 불살랐다. 음악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생각으로 음악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스쿨밴드에서 그는 작사와 작곡에 보컬 그리고 일렉트로닉 기타까지 맡은 만능 멀티 플레이어로 팀의 리더였다. 그는 일본 공중파 방송사가 주관하는 순수 창작 음악 경영대회에 참가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그..
새로운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아무도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는 미지의 초원을 걸어가는 느낌이다. 파이널 환타지의 아버지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일본식 롤플레잉 게임을 전세계에 알린 명장 게임 크리에이터이다. 파이널 환타지가 처음 등장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드래곤 퀘스트의 인기에 영합한 아류 작이라면서 비난을 하였다. 하지만 실제 게임을 플레이 한 사람들의 입 소문을 타기 시작하면서 최고의 롤플레잉 게임 시리즈로 거듭나게 된다. 파이널 환타지는 드래곤 퀘스트와 여러 가지 점에서 비교가 된다. 드래곤 퀘스트는 기존의 캐릭터와 게임시스템을 계속해서 유지하면서 정통성을 내세우는데 비해서 파이널 환타지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드래곤 퀘스트에서의 세계관과 캐릭터가 정해져 있지만 파이널 환타지는 세계관과 캐릭터자체가 계속해..
스즈키 유는 세계 최고의 기술을 가진 AM연구소의 책임자가 되어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였다. 한국에서 최고의 게임 기술을 가진 개발팀은 엔씨 소프트의 E&G 팀이다. 그리고 이 팀의 총책임자가 바로 배재현 상무이이다. 언리얼 엔진의 힘을 빌렸다고는 하지만 리니지 2의 기술 역시 당시로써는 세계최고의 수준이었다. 한국에서도 이런 게임을 만들 수 있구나 생각하면서 게임의 그래픽에 감탄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배재현 상무는 과거 하이텔 게임기 동호회에서 세가관련 소식을 가장 먼저 알렸던 게임마니아였다. 그러던 중에 병역특례로 일하던 현대 전자 연구소에서 현재의 NC 소프트 사장인 김택진씨를 만나며 본격적으로 컴퓨터 게임개발에 뛰어든다. 배재현 상무는 리니지의 핵심 개발자 다섯명(송재경 김민수, 김형진, ..
세계 3대 격투 게임은 드림캐스트의 버추어 파이터와 플레이 스테이션의 철권 그리고 XBOX의 데드 오어 얼라이브를 일컫는 말이었다. 사실 데드 오어 얼라이브는 스즈키 유가 이끌었던 AM2연구소의 기술적인 도움과 자문이 없었다면 탄생하기 힘든 작품이었다. 세가의 가정용 게임기인 새턴에 게임을 발매한다는 조건으로 세가에서 여러모로 큰 도움을 주었다. 이때 이타가키는 스즈키 유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타가키가 가장 좋아하는 게임이 버추어 레이싱이고 데드어오 얼라이브는 버추어 파이터를 보고서 만든 작품이라고 할 정도로 이미 그전부터 스즈키 유의 추종자였다. 게임 제작이 난관에 부딪힐 때면 직접 스즈키 유에게 찾아가서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이타카키는 스즈키 유처럼 프로그래머 출신이었고 실제 데드 오어 얼라이브..
스즈키유는 게임 크리에이터 중에서 가장 다재 다능한 사람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으로 미술 전시회를 열 정도로 수준급의 그림실력을 보여준다. 이미 AM2연구소에서부터 프로그래밍 실력은 최고로 인정 받았다. 그는 자동차와 오토바이로 속도를 즐기는 스피드 광이기도 하다. 세가에서 페라리라는 말이 나오면 스즈키 유를 연상할 정도로 동급의 이미지로 취급 받을 정도이다. 모터 스포츠외에 그가 즐기는 취미는 와인과 당구이다. 이미 당구는 쉔무에서 게임으로 구현했고 그는 이제 자신이 좋아하는 와인을 게임에 어떻게 접목할 것인가 고민을 하고 있다고 농담 삼아 말한다. 그는 행복한 가정을 가꾼 훌륭한 가장 중에 하나다. 그는 집에서 아이들과 하는 게임이 가장 재미있기 때문에 직장에서 일로써 게임..
스즈키 유의 AM2 연구소는 가정용 게임이 아니라 오락실의 아케이드 게임을 전문으로 하는 곳이었다. 세계최고의 기술력으로 세계최고의 게임을 개발한다는 그들의 좌우명 되로 AM2 연구소는 버추어 파이터 이후 최고의 기술력을 가진 최고의 게임 개발팀으로 공인 받게 된다. 세가가 AM 연구소의 이러한 명성을 그냥 놔둘 리가 없었다. 가정용 게임기 시장에서 부진했던 세가의 경영진은 AM2연구소에 가정용 게임기인 드림캐스트 전용으로 게임을 개발하도록 지시를 내린다. AM2 연구소는 이로써 첫 번째 가정용 콘솔 게임 전용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된다. 사실 이것 때문에 AM2 연구소에서는 여러 가지 논쟁을 벌여야 했다. AM2 연구소가 콘솔 전용 게임을 개발하게 된다는 것은 하드웨어의 제약 없이 무조건 세계 최고 기술..
1980년대 후반만해도 3D 기술은 백만 달러가 넘는 초고속 컴퓨터의 전유물이었다. 그래서 3D 그래픽 기술을 게임에 접목하려는 시도는 감히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세상의 단 한명 스즈키 유는 그 동안의 명성 덕분에 당돌하게도 3D 전용의 하드웨어 머쉰을 게임에 구현할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만든 것이 바로 MODEL 1이다. 스즈키 유는 당시 비행기 조종사들을 대상으로 실제 비행기를 탄 것처럼 가상적인 그래픽환경을 3D로 제공하여 교육 시키는 컴퓨터 기술을 게임에 응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스즈키 유는 전투기나 비행기를 만드는 록히드 마틴사가 그 기술에 최고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들과 접촉했다. 그렇게 해서 록히드 마틴사는 세가의 주문대로 동시 발색수 1600만색에 1초당 18만폴리곤..
스즈키 유는 1958년 6월 10일 이와테 현의 외곽지역인 카마이시에서 태어나서 그곳에서 자랐다. 그는 어린 시절 게임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로 미술과 음악과 같은 예능 분야에 조예가 깊었는데 이 덕분에 그는 공부 이외에도 여러 예능 활동을 하느라고 다른 것을 할 시간이 없었다. 중학교 때부터는 서예와 그림까지 공부하면서 그는 게임 크리에이터가 갖춰야 할 기본능력을 이미 갖추게 되었다. 물론 그는 이때까지의 모든 예능 활동이 게임 개발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는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다. 그는 그때까지 게임이라는 것 자체를 몰랐던 시절이었다. 자신은 그저 아버지처럼 초등학교 교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스즈키 유는 오카와마 공과 대학에 입학해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게 된다. 대학생..
"오늘 실패한다고 해서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실패했다고 해서 내일도 모레도 계속 실패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게임 개발이라는 것은 대부분 실패의 연속입니다. 실패가 거듭되다가 포기하기 직전 성공하는 것이죠. 내일은 내일의 바람이 붑니다. 실패를 두려워하면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스즈키 유는 버추어 파이터 시리즈로 일약 세계적인 게임 크리에이터로 도약했다. 하지만 세계최초의 아케이드 게임인 “행온”을 1985년에 발표하면서 이미 세가 내에서는 최고의 게임 크리에이터로 인정받고 있었다. 행온은 그가 1983년에 세가에 입사해서 단 2년 만에 이루어놓은 성과이기에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행온에서 그는 프로그래밍과 기획을 같이 담당하여 게임의 개발에 절대적인 공헌을 ..
조기용 사장은 비록 피터 몰리뉴처럼 하나의 장르를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한국 최초의 3D MMORPG 게임인 뮤를 개발하여 한국 게임의 성과를 드높인 게임 크리에이터이다. 조기용 부사장은 스즈키 유가 개발한 세가의 3D 격투 액션 게임인 버추어 파이터에 감동하여 게임 개발자가 될 것을 꿈꾸게 된다. 혼자서 독학으로 프로그래밍 공부를 하였고 시험 삼아서 만든 프로그램을 하이텔 게임 제작 동호회에 올려서 개발자들 사이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도 3D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하고 있었을 때에 대학교 1학년생이 독학으로 3D 엔진을 개발했다고 하니 사람들이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이런 능력은 많은 게임회사들의 입 소문을 타고 스카우트의 표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