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몰리뉴는 포퓰러스로 갓 게임을 창시해서 그 장르의 최고가 되었다. 이렇게 하나의 장르를 만들어서 그 장르의 최고가 되는 게임 크리에이터에게 거장이라는 말을 할 수 가 있다. 코지마 히데오 역시 첩보 액션 게임이라는 장르를 만들어서 그 게임의 최고 대가가 되었다. 코지마 히데오는 1963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강제로 보여주는 영화였지만 결국 그는 영화광이 되고야 말았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지만 실패하고 게임회사인 코나미에 입사하게 된다. 펭귄 어드벤쳐라는 게임의 보조를 한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담은 로스트 월드를 기획하지만 시장성을 이유로 취소당한다. 그리고 다음에 기획한 게임이 바로 메탈기어이다. 처음 스파이를 소재로 코지마 히데오가 게임을 기획했을 때만 해도 회사 내부에서는 그를 비웃..
피터 몰리뉴는 영국과 유럽을 대표하는 기획자이니만큼 그는 단순히 자기의 게임회사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항상 유럽에서 게임 산업이 어떻게 해야 발전할 것인지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한다. 300여 개 였던 게임 개발사가 수십 개에 불과해진 현재의 유럽의 상황에 대해서 그는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회사가 자금을 투자 받는 방식에 대한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그의 이런 노력을 알기 때문에 영국왕실에서도 그에게 영국 국민에게 최고의 영예인 대영제국훈장(OBE)을 선사한 것이다. 현재 영국 왕실도 게임을 미래 전략 산업으로 보고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영국 왕실의 앤드류 왕자가 한국에 와서 게임업체인 엔씨 소프트와 웹젠을 방문한 것도 이런 전략의 일환이다. 토니 블레어 수상도 피터 몰리뉴..
EA를 그만 둔 후에 피터 몰리뉴는 무조건적인 휴식을 선언한다 그래서 한때 사람들은 그가 게임계에서 은퇴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돈도 많이 있으니 일주일에 100시간씩 일하는 게임 개발자 보다는 뭔가 편한 일을 찾아 볼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약간의 휴식을 하고 바로 게임계로 복귀한다. 그리고 라이언 헤드를 설립한다. 그는 게임 개발사를 차리면서 한가지 결심을 하게 된다. 한 팀에서 20명 이상을 투입시키지 않겠다는 것이다. 가족 같은 분위기를 유지하고 긴밀한 관계 속에서 게임을 개발할 수 있는 개발 인력의 한계를 20명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급박한 상황 속에서는 더 많은 인력을 투입하는 비상 사태가 있을지라도 핵심 인력은 무조건 20명을 상한으로 두는 원칙을 세웠던 것이다. 이러..
피터 몰리뉴는 새로 게임회사를 창업하면서 우선 회사이름을 게임회사와 어울리는 볼프로그(Bullfrog )로 개명하기로 한다. 그는 뭔가 세상을 깜짝 놀랠만한 새로운 장르의 게임을 개발하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의 유년시절을 떠올렸다. 개미들을 괴롭히며 자신이 그들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절대자의 기분과 느낌을 게임에 적용하면 어떨까 하고 고심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컨셉을 확대 발전시켜서 게임 플레이어가 신이 되어서 세상을 다스리면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을 해보았다. 이렇게 해서 신이 인간생활에는 직접 개입하지는 않지만 주변환경이나 날씨등의 변화를 통제하면서 인간이 어떻게 반응할지를 지켜보는 갓 게임(God Game)을 제작하게 된다. 이게임의 원래 제목은 크리에이션(CREATION)이었으나 게임을 유통..
개미 킬러였던 어린 시절 피터 몰리뉴는 1960년 영국 길포드 써레이(Guildford, Surrey)에서 장난감 가게 주인의 아들로 태어난다. 곤충들에 대한 특별한 호기심을 제외하고는 그의 어린 시절은 일반 사람과 틀린 것이 없었다. 그는 다섯 살쯤에 집의 앞마당에서 우연히 개미떼를 발견한 이후에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큰 재미를 느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인가 개미들의 생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우선 막대 사탕과 과자 그리고 설탕들을 모아서 개미들이 모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의 이동경로를 따라서 흙을 팠다. 개미들의 본거지를 찾기 위해서였다. 개미 본거지에서 여왕개미를 보고서 그들의 권력관계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는 왠지 모르게 심술이 난 그는 개미들의 안식처(?)를 일부러 부..
나는 한때 게임이 스노보드와 같이 일시적인 유행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게임은 영화의 최고 경쟁자이다. 와우~! 정말 놀랍지 않은가요? 영국 명예 훈장 수상 소감 중에서 피터 몰리뉴는 리차드 게리엇(울티마 시리즈 개발) 그리고 시드마이어(문명 시리즈 개발)와 함께 세계 3대 게임 개발자로 불린다. 하지만 필자 본인의 생각에 그는 리차드 게리엇이나 시드 마이어보다는 중량감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리차드 게리엇은 아시다시피 울티마라는 게임으로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을 최초로 개발했고 6개월 차이로 최초의 타이틀은 놓쳤지만 울티마 온라인을 통해서 MMORPG 게임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또한 시드 마이어는 게임타이틀에다가 자기이름을 붙인 최초의 게임 크리에이터이다. 시드 마..
리차드 게리엇은 게임 크리에이터 중에서 가장 쇼맨쉽이 강한 사람 중에 하나다. 자신은 브리티니아(게임 울티마에 등장하는 지역)를 다스리는 군주라면서 자기를 로드 브리티시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대단한 쇼맵쉽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게임이라는 가상의 세계뿐만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게임속 캐릭터처럼 살려고 한다. 말투나 복장까지 중세복장을 입고 칼을 휘두르는 제스처로 게임을 홍보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일본의 크리에이터들은 리차드 게리엇처럼 쇼맨쉽이 있는 사람을 찾기는 힘들다. 바이오 하자드의 미카미 신지정도가 바이오 하자드 속의 게임 캐릭터 복장을 하고서 게임 페스티벌을 열려고 했지만 사람들의 참여가 적어서 취소 된 적은 있었다. 그러나 야마우치는 좀 다르다. 게임 쇼의 무대에서 매년 춤을 추는 그는 게임..
리차드 게리엇이 생각하는 게임이란 우리는 세상을 창조한다고 외쳤던 오리진의 모토속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그가 항상 강조하는 세상을 창조 한다는 의미는 톨킨이 반지의 제왕을 쓰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톨킨은 단순히 스토리만 쓴 것이 아니라 환타지라는 세상을 창조하였다. 반지의 제왕 속에서 살아가는 종족들은 모두 그들의 전설과 역사가 있다. 또한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문화와 관습이 들이 있는데 이 모든 것을 톨킨이 창조해내었다. 그 역시 톨킨처럼 울티마를 통해서 그의 세상을 창조하려 하였다. 그리고 리차드 게리엇은 그가 창조한 세상을 단순히 게임이라는 가상 세계속에서 머물러 있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게임 속에서 만들어 놓은 것들을 현실에서도 재현하려는 노력을 많이 한다. 단지 ..
리차드 게리엇은 마침 MIT에서 경영학 석사를 공부하고 있던 형 로버트 게리엇(현재 미국 NC 소프트 대표로 있다.)의 도움을 받아서 오리진 시스템즈를 창업한다. 이 때문에 개발은 리차드 게리엇이 머무는 텍사스주의 휴스턴에서 진행하고 재정과 홍보 같은 회사의 기타 업무는 메사추세추 주에서 로버트 게리엇이 업무를 처리했다. 로버트 게리엇은 나중에 석사학위를 받고 리차드 게리엇과 함께 텍사스 오스틴에서 합류를 한다. 오리진 시스템즈의 울티마3는 보다 강력해진 그래픽에 파티 시스템을 첨가하였다. 시장에 발매된 울티마3는 역시 롤플레잉 게임의 개척자자라는 평가를 받으며 역시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둔다.어느덧 리차드 게리엇이나 그의 집안에서도 이제 게임 개발은 취미나 장난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바친 가업이 되어..
이공계 학과에서 미국의 명문대학의 하나로 손꼽히는 텍사스 대학에 합격한 리차드 게리엇은 대학에 입학 하기 전에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컴퓨터 랜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컴퓨터 랜드는 애플컴퓨터와 소프트웨어 그리고 각종 소모품을 파는 컴퓨터 상점이었다. 그는 매장에 있는 애플컴퓨터를 이용해서 게임을 개발할 결심을 한다. 그리고 그는 놀랍게도 세계최초로 그래픽을 지원하는 롤플레잉 게임으로 인정받는 알카라베스(Akalabeth) 를 전격적으로 개발한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를 전혀 몰랐다. 단지 컴퓨터 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니깐 자신의 게임을 상점에서 팔 수 있을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을 가졌을 뿐이다. 게임을 완성한 그는 200 달러를 들여서 직접 디스크에 게임을 복사하고 플라스틱 가방..
리차드 게리엇은 우주 연구소에서 우주 비행사로 일하는 아버지 오웬 개리엇(Owen Garriot)의 아들로 영국 캠브리지에서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후 두 달 만에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의 교수로 임명되는데 이때 리차드 게리엇은 미국 텍사스 오스틴으로 이사 오게 된다. 그의 집안은 정말 학구적인 집안의 전형과도 같다. 아버지는 대학교수이고 어머니는 예술학 석사를 받았다. 큰형은 나중에 의사가 되고 다른 형도 석사학위를 받게 된다. 그의 여동생 또한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명문대학으로 일컬어지는 텍사스대학을 나온 그가 어린 시절 공부 때문에 기가 죽을 정도였다고 하니 정말 대단한 집안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휴스턴에 있는 클리어 클릭 고등학교 시절을 잊지 못한다. 고등학교 시절의 여러..
우리는 실감나는 시뮬레이션과 기술적인 혁신으로 세상을 창조한다. 우리는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에 지금까지 비교할 수 없는 정성을 다하여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여 세상을 창조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는 재미있는 세상을 창조 한다는 것이다. 리차드 게리엇은 오늘날 게임산업을 이끈 개척자중에 하나다. 1970년대부터 게임을 개발한 미야모토 시게루는 일본을 대표하는 크리에이터라면 그는 미국을 대표하는 크리에이터이다. 미야모토 시게루가 오늘날의 일본이라는 세계 게임 강국을 만드는데 공헌했다면 그는 미국 컴퓨터 게임 산업의 시작과 함께 하였고 오늘날 이렇게 발전시킨 사람이다. 사실 1980년대 초반만해도 컴퓨터 게임이라는 것은 그냥 한때 일시적으로 유행하고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컴퓨터에 미친..
빌로퍼와 오카모토는 묘한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다. 우선 둘이 회사를 그만 둘 때가 2003년도 6월로 비슷한 시기이다. 그런데 이 둘은 비대해진 회사에서 원하는 게임을 개발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사퇴이유까지 똑같다. 새로운 게임을 개발하지 않고 후속작으로 수익을 챙기려는 회사에 불만이 생겼던 과정도 비슷하다. 무엇보다 기이한 것은 바로 플래그 쉽이라는 회사이름이다. 빌 로퍼가 블리자드를 그만두고 새운 회사의 이름이 플래그 쉽인데 오카모토가 귀무자와 바이오하자드의 시나리오를 전담시키기 위해서 캡콤 재직시에 세운 회사가 바로 플래그 쉽이었다. 회사를 그만 두었을 때 전 직장의 동료 대여섯 명과 같이 독립하는 과정도 비슷하고 다른 대형 게임 퍼블리셔 업체가 서로 스카우트 하려는 광경마저도 똑같았다. 그리고 ..
2003년에 빌로퍼는 전격적으로 블리자드 노스 부사장직을 그만 두었다. 경영난에 봉착한 비벤디가 게임 개발팀과는 대화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회사를 운영하면서 생긴 불만 때문이었다. 그는 블리자드 노스에서 같이 일했던 12명의 직원과 함께 플래그쉽을 전격적으로 창립한다. 그는 현재 2007년 발매를 목표로 PC 용 FPS 게임인 헬게이트 런던을 제작 중에 있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게임이란 배우기는 쉽지만 최고수가 되기는 어렵고 매번 플레이 할 때마다 새로운 재미가 느껴지는 게임이다. 그는 게임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는 우선 매 순간 게임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순간 GTA와 같은 게임아이디어가 떠오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영화를 통해서도 많은 아이디어..
오랜 발매 연기 끝에 1998년도에 출시된 스타크래프트가 처음 등장했을 때 많은 사람들의 실망을 생생히 기억한다. 다른 게임들이 3D효과를 내세워서 강력한 그래픽을 자랑했지만 스타 크래프트는 고작 256색의 2D 그래픽에 불과 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유행을 선도하는 그래픽에 비해서 스타 크래프트의 그래픽은 왠지 모르게 촌스러웠다. 초기의 반응은 듄2의 아류작이라면서 비난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렇지 않아도 블리자드는 웨스트 우드의 커맨드 앤 퀀커를 흉내 내고 있다면서 원색적인 비난을 들었던 때이다. 이러한 비난은 스타크래프트가 발매되기 전 참가했던 E3쇼에서부터 예견됐었다. 뭔가 표현할 수는 없지만 어설픔이 느껴지는 게임 스크린 샷으로 인해서 전세계의 게임 마니아들의 불만이 쌓여 가고 있던 터였다. 그리고..
1994년 미국의 퍼블리셔 업체인 인터플레이에서 발매된 워 크래프트는 10만장 정도의 판매량을 기록하였지만 블리자드라는 회사를 게임 유저에게 알리는 계기가 된다. 워 크래프트에서 음악과 내레이션을 맡은 빌로퍼는 정직원으로 승격된 후에 워크래프트2의 수석 프로듀서가 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능력을 맘껏 발휘하며 당시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의 최고봉으로 인정받았던 웨스트 우드의 커맨드앤 퀀커와 함께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의 양대 산맥이라는 칭호를 얻으면서 워크래프트2를 성공시킨다. 워 크래프트2의 판매량은 무려 100만장이 넘어 섰으며 블리자드는 메이저 회사로 발돋움하게 된다. 재정적으로 여유로 와진 블리자드는 여세를 몰아서 기존에 프로그래밍 외주 하청을 주었던 업체인 콘도르를 인수 합병한다.콘도르는 데이비드..
블리자드(Blizzard) 는 1991년도에 마이크 모하임과 앨런 애드햄, 프랭크 스피어스 의해서 창업되었다. 처음 회사를 만들 때만 해도 회사의 이름은 실리콘 & 시냅스였고 컴퓨터 게임 보다는 팬앤 페이퍼(Pen &Paper) 방식의 롤플레잉(Role playing)용 보드 게임을 주로 제작 하였다. 레이싱과 로스트 바이킹스와 같은 콘솔용 게임을 개발 하였으나 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회사의 재정은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빚은 늘어만 가고 있었다. 결국 회사는 데이비슨 앤 어소시에트에 인수 되었지만 블리자드라는 이름과 경영진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회사자금에 다시 여유를 가지게 된 블리자드는 PC 용 게임인 액션게임 블랙쏜(Blackthorne)을 인터플레이를 통해서 발매하며 처음 성공이라는 것을 거두게 ..
“ 게임 패키지에 적힌 회사나 게임제목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영화를 선택할 때 아놀드 슈활츠 제네거가 출연한 영화나 스티븐 스필버그가 연출한 영화를 본다. 책을 선택할 때는 누가 작가인지를 보는 것과 같다. 해리포터의 J.K 롤링처럼 말이다. 이렇듯 게임은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게임을 선택할 때는 누가 만들었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이 책은 아시다시피 미국 인터랙티브 아츠 앤 사이언스 학회(Academy of interactive Arts & Science) 에서 주관하는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게임 크리에이터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셜 게스트라는 기이한 항목을 만들어서 빌 로퍼를 소개하는 것은 그가 한국 게임계에 끼친 영향이 너무나 커서 도저히 무시할 수가..
한국에서도 역사를 소재로 하여 게임을 전문으로 개발하는 게임 크리에이터가 있다. 바로 거상과 군주로 유명한 엔도어즈 개발 이사 김태곤씨이다. 1992년 김태곤씨는 홍익대 전자공학과에 재학중에 고등학교 동창 친구들과 함께 아마추어 게임 개발팀인 HQteam을 조직한다. HQteam이 첫 번째로 개발한 게임은 바로 이순신을 소재로 한 리얼타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인 충무공전이다. 그 후에 임진록과 천년의 신화 같은 패키지 게임을 제작하며 세상에 서서히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그가 본격적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은 거상 온라인 덕분이었다. 기존의 온라인 게임들이 전투위주의 MMORPG게임으로 어린이들에게 정서상 좋지 못하다는 비난을 듣던 와중에 거상은 경제 개념을 심어주는 교육적인 게임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
일본에서는 최고령 게임 크리에이터로 유명한 에리카와 요이치는 시드 마이어와 여러 가지 면에서 정말 많은 부분이 닮아있다. 에리카와 요이치는 코에이의 창업자로 삼국지와 노부나가의 야망과 같은 역사 게임을 기획하고 프로그래밍한 사람으로 일본의 시드 마이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지는 중국 삼국시대의 조조나 유비 같은 인물이 되어서 정치, 경제, 사회, 과학, 외교를 총괄하는데 시드 마이어의 문명 역시 특정문명시대의 지도자가 되어서 정치, 경제, 사회, 과학, 외교분야 대해서 통치를 하는 것과 개념이 유사하다. 시드 마이어의 문명은 여러 문명들을 개척하고 발전시키는데 인기 있는 문명은 역시 로마였다. 아시아의 로마라고 불리는 중국의 삼국지를 소재로 게임을 만든 에리카와 요이치와 서로 상통하는 면이 있다. 특히 ..
게임은 흥미로운 선택들의 연속이라는 정의는 게임 개발자들이 가장 즐겨 하는 말 중에 하나다. 보통 게임 개발자들에게 게임은 무엇이냐고 물으면 항상 모범 답안처럼 게임은 흥미로운 선택들을 연속적으로 제공해주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필자는 한동안 그 말이 작자 미상의 게임계 격언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시드 마이어가 게임에 대해서 밝힌 견해임을 알게 되었고 그의 탁월함에 다시 한번 놀란 적이 있었다. 게임은 흥미로운 선택들의 연속이라는 것은 게임의 특질을 꿰뚫는 명언이다. 게임은 게임유저에게 한가지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다. 게임은 게임 유저가 다양한 선택사항을 가지고 그에 따른 여러 결과물들을 감상할 수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게임의 본질이다. 그래서 그는 게임 기획자에게 게임을 개발할 때 항상..
새로운 회사를 창립할 결심을 한 시드 마이어가 우선 먼저 생각한 것은 경영자를 영입하는 것이었다. 자신은 개발에 전념하고 회사의 경영과 팀의 관리를 전적으로 맡을 사람을 원했던 것이다. 마침 같은 회사의 동료인 제프 브릭스(Jeff Briggs)도 소규모 회사에서 하나의 게임에 전념하는 시스템을 선호하는 사람이었다. 대규모화된 회사에 염증을 느끼던 제프 브릭스는 공공연히 회사의 운영방침에 반대하였다. 자기가 만약 회사를 세우면 우선 3명 정도의 소수가 프로토 타입의 게임을 완성한 후에 게임의 재미를 평가하고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시드 마이어는 제프 브릭스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였고 둘은 금새 의기 투합 할 수 있었다. 회사의 중심은 마케팅이나 경영이 아니라 개발팀위주여야 한다는 신념..
시드 마이어의 게임 인생은 확실히 1991년 이전과 그 이후로 나뉜다. 문명 이전에는 유명한 게임 개발자 정도에서 문명 이후에는 명실공히 세계 최고수준의 게임 개발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게임 개발자의 톱이 된 것이 아니라 전체 문화산업에서 톱이 되었다. 그래서 게임 크리에이터와 게임의 위상을 높였다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그 후 시드 마이어라는 이름은 이미 성공을 보장하는 이름이었고 그는 그의 이름에 걸맞은 여러 게임들을 연속적으로 내놓았다. 하지만 마이크로 프로즈의 재정은 날로 어려워졌다. 마이크로 프로즈는 갑작스런 성공으로 대규모의 인원들을 고용했는데 이들을 효율적으로 이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빌 스텔리는 그 책임을 철저히 자신에게 있다고 말한다. 게임 재정과 마케팅을 책임지는 자신이 게임 ..
게임 역사상 최고의 게임 문명 계속적으로 그의 게임이 성공하게 되자 이번에 그는 더욱 대범한 시도를 하게 된다. 인간 문명의 시작과 발전을 테마로 하여서 게임을 개발할 결심을 한것이다. 이는 게임 역사상 전무후무한 시도였다. 인간의 역사와 컴퓨터 기술을 꿰뚫을 수 있는 탁월한 식견이 없다면 애초에 불가능한 기획이었다. 그는 게임 시스템을 세우는 데만 해도 수개월을 그냥 흘려 보내야 했다. 게임 하나에 정치, 경제, 군사, 외교, 사회를 담아내려는 시도는 무모한 것처럼만 보였다. 하지만 자신이 어린 시절 즐겼던 보드 게임을 참고하면서 점차적으로 게임의 구색을 맞추어 갈 수 있었다. 문명이라는 테마는 매력적이었지만 게임으로 만드는 데는 정말 복잡한 문제였다. 아무리 게임이 사실적이라고 해도 재미가 없으면 아..
사실 둘은 회사를 막상 차렸지만 자신들의 일에 확신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 둘은 원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지 않고 몰래 게임을 개발했던 것이다. 이른 바 투잡스였다. 6개월 동안 낮에는 회사에 출근하고 밤에는 모여서 게임을 개발했던 것이다. 그리고 개발 중인 게임에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나자 게임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그러고 나서야 회사를 그만두고 게임 개발에 전념했다. 2주만에 레드 바론보다 훨씬 좋은 게임을 개발하겠다는 시드마이어의 장담 한마디로 시작한 마이크로 프로즈답게 그 둘은 창업을 하고 1년 정도 연구기간을 가지더니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스핏 파이어 에이스(Spitfire Ace)를 시작으로 솔로파이트(Solo Flight), 아크로젯(Acrojet), 스트라이크 이..
시드 마이어는 미시건주 디트로이트에서 1954년에 태어난다 그는 학창시절 책과 보드게임을 특별히 좋아했다는 점을 빼고는 일반 다른 학생과 다를 것이 없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는 역사, 해적, 비행기에 관한 책들을 많이 읽었는데 이것은 나중에 그가 문명, 해적, 스트라이크 이글 같은 게임을 개발하는데 있어서 큰 영감을 제공해 주었다. 그가 즐긴 보드 게임으로는 경영을 소재로 한 모노폴리와 전쟁을 소재로 한 게임들 이었다. 이러한 보드 게임에 대한 기억은 그가 턴 기반의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개발하는데 고스란히 녹아져 있다. 미시건 대학에서 역사학과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그는 제너널 인스트루먼트라는 컴퓨터 회사에 시스템 관리자로 취직한다. 여기에서 그는 편의점이나 상점에 자동화된 계산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세계 모든 게임 기획자들의 교과서 시드 마이어 게임 크리에이터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고 가장 재미있는 직업이에요. 그래서 저는 세계 최고의 행운아죠. 시드 마이어는 블랙앤 화이트(Black and White)시리즈의 피터 몰리뉴 그리고 울티마(Ultima) 시리즈의 리차드 게리엇과 함께 세계 3대 게임 개발자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명예의 전당에 오른 다른 크리에이터와는 다른 면이 있다. 그는 게임 역사에 획을 긋는 새로운 장르를 창조하여 천재라는 격찬을 듣는 크리에이터가 아니다. 또한 게임 역사상 최다 판매량을 기록하며 화려한 스폿라이트를 받는 크리에이터도 아니다. 일반적으로 명예의 전당은 새로운 장르를 창조하거나 게임 역사상 가장 성공한 게임을 만든 사람의 전유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야 모토 시게루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게임을 개발한 게임 크리에이터이다. 대부분의 크레이에이터가 액션이면 액션 시뮬레이션이면 시뮬레이션처럼 특정 장르에 치우치기 마련인데 미야모토 시게루는 액션에서부터 롤플레잉 그리고 시뮬레이션까지 온갖 장르를 넘어서면서 자유롭게 게임을 개발했다. 그의 수제자로 불리 우는 나카 유지 역시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게임을 개발했다. 한국은 아쉽게도 대부분의 크리에이터들이 롤플레잉 게임에 편중되어 있다. 하지만 이원술 사장은 롤플레잉 게임에서 시뮬레이션 그리고 액션과 호러 어드벤처 등의 다양한 게임을 개발하였다. 또한 미야모토 시게루는 최초와 최고의 수식어를 가장 많이 들어왔는데 이원술 사장 역시 최초와 최고의 소리를 듣는 게임을 많이 개발하여왔다. 최초의 일본식 ..
슈퍼마리오의 영향을 받은 게임은 많다. 그것도 나중에 세계적인 거장이 되는 게임 크리에이터들은 슈퍼마리오와 같은 횡스크롤 액션게임을 한번씩 개발을 했으며 미야모토 시게루의 영향을 받았다고 솔직히 인정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세계 최첨단의 3D FPS 게임을 개발한 양대 산맥 둠과 언리얼팀의 초기작이 슈퍼 마리오를 그대로 베낀 코맨더 킨과 재즈 젯 래빗이라는 것이다. 위에 언급한 게임들은 역시 큰 히트를 기록했고 회사의 현금창고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성공한 게임을 뽑는다면 역시 소닉이다. 소닉은 3천만 개의 판매량을 기록하며 세가신화의 초석이 되었다. 과거 닌텐도의 마리오와 세가의 소닉으로 표현하며 두 회사의 경쟁관계를 나타내기도 할 정도였다. 마리오가 점프의 상쾌함을 강조했다면 소닉은 바로 스..
슈퍼마리오와 젤다의 전설의 아버지 게임의 신 미야모토 시게루 2편 - 게임을 부활시킨 미야모토 시게루 아타리 쇼크이후 미국에서 게임은 그 수명을 다한 듯이 보였다. 사람들은 더 이상 게임을 하지 않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 1980년대 초반에 미국정부에서는 학교의 정규교과과정으로 컴퓨터를 채택했다. 게임에 대한 관심이 컴퓨터로 쏠리면서 게임은 더욱 외면 받았다. 특히 코모도어에서는 마케팅 전략으로 아이들의 학업에 방해가 되는 게임기를 사주느니 아이들이 대학가는데 도움이 되는 컴퓨터를 사주라는 광고를 자주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게임기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멀리하기까자 하였다. 이제 사람들에게 게임은 롤러스케이트처럼 그냥 일시적인 유행이었을 뿐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런 분위기가 더욱 팽배해있었던 1985년 ..